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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이을순
소설
4*6판/224
2020년 8월 20일
979-11-5860-874-3
13,000원

■ 작가의 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마음에서 피워낸 꽃들을
이제 세상 밖으로 내보냅니다.
비록 화사한 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잡초 속에 섞여 자란 꽃들이라
그 은은한 향기는 오래 지속될 겁니다.


2020년 노을이 지는 창가에서
이을순

 

 

■ 본문 중에서


바람새


대만으로 떠나는 원동항공기는 정확히 12시 12분에 이륙한다. 손목에 찬 시계를 주시하던 나는 불안한 생각이 마음을 휩쓸자 창가를 바라본다. 기이하게도 내 몸이 비현실적인 세계로 실려 가는 듯하다. 그곳에 도착하면 과연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무너지듯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는다. 많이 긴장한 탓인지 아랫배까지 팽팽히 당겨온다.
잔뜩 오므린 손을 살그머니 펴본다. 아직도 약지 손가락에는 1캐럿 다이아몬드반지가 끼워져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아몬드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토록 익숙한 반지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설어 보이는 걸까. 아니, 진즉에 빼버렸어야 할 반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러질 못했다. 창가에 이마를 붙이며 한껏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은 얼음 속 칼날처럼 차갑게 빛난다. 저절로 시선이 내리깔렸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는 바다에는 고깃배가 파도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그게 마치 그리운 사람을 찾아 떠나가는 배처럼 보인다. 내가 지금 그 어디엔가 있을 그를 막연히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만약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그동안 당신을 그리워하며 기다려왔다고 말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부정의 투로 고개를 내젓는다. 한번 떠난 배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설령 돌아온다고 해도 너덜너덜하게 찢긴 상처만이 핏빛 깃발처럼 꽂은 채 돌아올 뿐. 이미 그가 떠난 빈자리엔 얼룩진 상처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온한 지난 상처가 가슴에서 급류처럼 휩쓸고 지나가자 두 눈을 감아 버린다.
일 년 전, 내가 가희의 급한 연락을 받고 고향에 왔을 때, 가희는 대뜸 뜬금없는 말부터 꺼냈다. 언니를 왜 부른 줄 알아? 이제 언니는 돈방석에 앉게 됐어! 나는 그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가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희는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말했다. 언니, 보름 전 친구를 만나러 S호텔 커피숍에 갔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그 사람을 만났지 뭐야. 한성필 그 사람 말이야.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날 알은체를 하는 거야. 순간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신경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너무 놀란 표정으로 가희를 바라보자 가희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쪽 눈을 흘겼다. 언니, 내가 이런 사실을 전화할 때 미리 말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그러고는 더딘 손길로 핸드백에서 그의 명함을 찾았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봤다. 분명 현실이었다. 가희의 손에 그의 명함이 들러져 있는 걸 보자 눈에 섬광이 일면서 심장박동은 급격히 빨라졌다. 그 명함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그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성그룹 회장 한성필’이라고 쓰인 활자가 나로서는 도무지 해독할 수 없는 기호문자처럼 보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공교롭게 기내에서 만난 여자는 같은 상가 일층 식당 여자다. 여자는 입 언저리를 일그러뜨리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어머나 자기, 혼자서 여행을 떠나?”
“아, 아뇨. 여행이 아니라….”
내가 당황해하며 끝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여자는 금세 무례한 표정으로 냉큼 내 옆 빈 좌석에 앉는다. 그러고는 힐끔힐끔 날 째려본다. 나는 애써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씁쓸하게 웃는다. 설마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켕긴다. 여자는 사립탐정이라도 되듯이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날 위아래로 쭉 훑어본다. 그 세 치 혀끝에서 독을 뿜어낼 것만 같다. 무슨 말인가 꺼낼까 말까 망설이던 여자의 입이 마침내 열린다.
“자기, 어젯밤에 송 사장 마누라가 응급실로 실려 간 거 알고 있어? 뒤풀이 자리에서 자기가 먼저 나가고 곧장 송 사장이 뒤를 따라갔잖아! 얼마 후 송 사장은 자기 마누라를 데리고 단란주점으로 들어왔어.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 여편네가 별안간 맥주를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그걸 냅다 바닥에 내던지는 게야. 알고 봤더니 자기가 송 사장한테 백여우처럼 살살 꼬리 쳤다면서? 그 일로 야단법석이 났단 말이야. 혹시 자기, 그 위기를 모면해보겠다고 지금 여행을 떠나는 거 아냐?”
뜬금없는 여자의 말에 이게 웬 수작인가 싶었다. 여자의 눈빛에 드러난 이상야릇한 비난이 온통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털끝만큼도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그 태도에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다. 여자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어깨를 바짝 내게 붙인다. 정말이지 영 재수가 없고 밥맛없기는 송 사장이나 여자나 매일반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송 사장은 아무 통고도 없이 급히 상의할 게 있다면서 상가건물 상인들을 일층 식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장사를 끝낸 상인들은 혹시나 임대료를 깎아주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로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한데 송 사장은 상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도리어 임대료 인상에 대한 안건처리를 놓고 이런저런 구실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경기불황 때문에 자영업자들이 죽을 판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대료 인상문제가 거론되자 발끈한 상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언성을 높이며 고성이 오갔다. 그때 유독 식당 여자만 입을 앙다문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누군가는 식당 여자와 송 사장이 내연관계라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나는 그런 뜬구름 같은 소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회의가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벽에 부착된 거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광 불빛에 반사된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너무나 초췌해 보였다. 꿈과 희망을 모두 상실해버린 공허한 눈에는 허무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내일 그를 만나러 대만으로 떠난다는 사실조차도 마음을 설레게 하진 못했다. 알 수 없는 부담감만 가증될 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 

 

바람새
당신의 노래
그대와 함께 탱고를
고백(중편소설)
플로리다에서 온 편지

이을순

 

충남 논산 출생
2004년 계간 『대한문학』 단편소설 「안개숲」 등단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제주문인협회 회원

서간집 『종이 위에 핀 꽃』
소설집 『떠도는 자들의 섬』 『고백』
장편소설 『그 여자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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