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반쯤 비어있는 것들로 채워진 저녁 나름 틀을 정해놓고 어루만져 놓은 하루가 가끔은 까닭 없이 서럽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어 바닥 치고 올라오는 공처럼 길 끝에서 길을 만들다 만 건조한 기운. 0시는 시간의 국경을 넘고 거친 숨들을 동그랗게 버무려 무채색 그림을 그린다. 비틀거리며 거꾸로 붓을 들고 쓰려니 참 고되고 쇠약하다. 내게 말 걸어오는 모든 진실에 소박함을 담아 조심스레 실타래를 푼다.
2021. 봄에 소운 전민정
■ 본문 중에서
**바코드
저녁 무렵이다 장을 보러 나갔다 나란히 누운 고등어 그들에겐 가격표가 없었다 검은 비닐봉지 안으로 들어와 내 것이 되기까지 수없이 뒤적거림 당하며 몇 번의 이력서를 썼을까 해동으로 풀린 빨간 눈의 생선을 들고 해피 포인트에 덧셈을 한다 지금 이 순간 선택되기까지 수없이 이력서를 쓴 나도 어딘가에서 바코드로 찍힐까 얼마의 해피 포인트로 기록될까 집으로 가는 보도블록 위로 나의 바코드가 찍힌다 2 0 6 9 5 1 9
**꽃도둑
오른쪽으로만 감아 돌며 맺힌 콩꼬투리 속 4개의 씨앗 잎 겨드랑 사이에서 형제들은 모두 굵직하게 잘 자라주었다 철없던 시절 동네 꽃이란 꽃은 이름도 모르고 죄다 꺾던 날부터 나는 꽃도둑이 되었다 화병에 물이 마를 때 밤 깊도록 꽃 찾아 맴돌다 돌아온 밤 꽃향기까지 따라와 멀미를 하던 순정 곱기만 한 꽃들의 사연들은 나 몰라라, 야생화가 최고여, 어머닌 은근히 꽃을 꺾어오도록 부추겼다 보잘 것 없는 덩굴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보랏빛 한 세기를 사신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 꽃도둑은 면할 수 없으리
**절반의 행복
미끄러지듯 집으로 향하는 밤이면 오후를 갉아먹은 불빛이 포장마차 빈틈으로 새어 나온다 가슴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허기 매달려 있던 그리움조차 대열에 끼어 앉아 자리를 펴고 따끈한 국물 한 사발에 녹아지는 영육이 가볍다 장맛처럼 묵직한 추억을 마시면서 오늘도 채워지지 않은 그 절반을 찾아 겨울 긴 의자에 앉아 미로를 걷는다
**나를 찾아서
조각난 단어들을 여러 개의 이름으로 갈라놓고 아픈 소리로 조율하다보니 반쯤 감긴 쉰 목소리 헐거운 옷을 반쯤 걸친 채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조용한 혁명을 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나라는 한 권의 책 속에 결박당한 채 꼼짝할 수가 없다 단어들이 몸 안으로 퍼지면 중추신경은 페이지마다 날카로워지고 추스르는 숨소리는 책갈피 속 언어가 된다
**찻잔에 띄우는 고요
아픔을 통해 깊어지는가 온몸 뒤틀며 빼앗긴 수분 명치끝이 아리더니 체기는 물 한 방울 허락하지 않는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마음과 몸속에 쌓였던 적 한 땀씩 질기게 풀어내고 비로소 깨달은 부질없는 집착 허겁지겁 소유했던 탐욕 정신줄 놓으며 떠밀려가던 시간 일엽차 한 잔을 우려낸다 찻잔에 띄우는 고요 비로소 온전해진 마음 맑게 퍼지는 사유의 향기 문 밖에 섰던 마음이 걸어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