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허허로운 바람이 가슴을 스치며 지나갈 때 너를 생각한다 일탈을 꿈꾸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너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행선지 없는 방황 둘러메고 밤의 골목길 걷다가 문득, 까닭 모를 분노에 휩싸일 때 문득,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그런 날이 있었다 ■ 본문 중에서
*대추나무 집
정겨운 골목길 따라 들어가면 드문드문 녹이 슨 철 대문 집 지붕 위 줄기를 말아 올린 호박꽃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지막이 조곤조곤 주고받는 목소리 밤늦도록 이어지고 아직 날이 밝기도 전 한 쌍의 비둘기처럼 나란히 어디를 가시는 걸까 바람이 들고나는 콩밭 이랑에 곁을 주지 않고 딱 붙어 다니신다 이슬 내린 밭둑에 새들이 날아오르고 아침 해 밀고 올라오자 애호박 한 덩이 따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가는 저, 노부부의 그림자
*엄마의 이름표
초저녁 하늘 뜬눈으로 불 밝힌 별 하나 새벽으로 간다 시계 초침 소리는 여전히 잠들지 못한 나에게 늘어진 엿가락처럼 다가오고 먼 인기척에도 셀 수 없이 가슴 쓸어내리며 지샌 밤 새벽은 더 가까이 와 있다 허탈한 가슴은 눈물조차 메마르고 바싹 탄 입안은 마른침마저 돌지 않는다 아직도 작은 아이 손에 꼭 쥔 로봇은 꿈인 듯 생시인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밖의 시간을 끌어당긴다
*제삿날
제사 장 보는 건 나의 일 과제물처럼 꼼꼼히 메모해서 재래시장으로 장 보러 간다 봄에 말려놓은 고사리 먼저 삶아 두고 깜박 잊고 잡아 둔 약속도 취소하고 절주도 미리 만들어 식혀둔다 명절이나 집안 제사가 돌아오면 차례상을 진설할 때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가르치며 책임을 주셨지 예뻐해 주시고 사랑 듬뿍 주셨지 과일을 좋아하셨으니 가장 크고 좋은 걸 골라야지 생선과 나물도 싱싱한 걸 드려야지 시장바구니 끌고 언덕 넘어 집으로 가는 길 내일은 내 남편의 아버지를 뵙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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