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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오후
함계순
소설집
4*6판/352쪽
2019년 5월 10일
979-11-5860-641-1(03810)
13,000원

작가의 말


내가 어릴 때 살던 마포 공덕동에는 예전 대원군의 별궁이 낡은 대궐처럼 서 있었다. 그때는 그 궁을 모두 대원군 별장이라 불렀었다. 그래도 대궐은 대궐이었고 전쟁 후까지 퇴색된 채로 아무도 살지 않는 아흔아홉 간의 빈 집이었다. 인근에는 그렇게 큰 집이 없었고 여염집으로는 그런 화려한 주택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솟을대문 앞으로 넓게 전답이 펼쳐있고 왼쪽 담을 끼고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 연못이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바다만큼이나 크고 아름다운 연못으로 여름이면 꼬마들이 멱을 감고 물장구를 쳐 대며 겨울에는 썰매를 타거나 학생들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던 물놀이장이며 이를테면 연못이면서 종합 스포츠 시설이었다. 초여름부터 분홍색 연꽃이 피어나고 빗방울이 구르는 널따란 연잎은 아이들의 부채나 우산도 되었다. 장마가 들 무렵이면 유난히도 이 연못에 맹꽁이 우는 소리가 요란하기도 했었다.
이 별장엔 언제나 대문이 열려 있어 이따금 바람을 쐬러 나온 동네 어른들이 대청이나 툇마루에 앉았다 가기도 하고 여름내 연못에서 멱을 감고 놀던 아이들은 발가벗은 원숭이처럼 툇마루에 앉아 햇볕에 몸을 말리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어린 여자아이는 사내아이들처럼 그 연못에 풍덩 풍덩 뛰어들지도 못하고 그저 애들 노는 것만 구경하다가 가끔 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이나 쳐다보았었다. 그때 우연히 보게 된 것은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까만 새였다. 하늘을 유유히 나는 그 까만 새는 솔개였다. 솔개가 뜨면 어느새 아이들이 “어, 솔개미 떴다. 병아리 감춰라!” 하며 어미닭에게 새끼를 지키라는 노랫소리가 재잘재잘 들려왔다. 솔개는 날개를 활짝 펴고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고 하늘에 떠 있다가 빙빙 돌면서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솔개에 대한 생각도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내겐 그저 아이들이 부르던 “솔개미 떴다. 병아리 감춰라!” 라는 단순한 노랫소리만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맴돈다.
세상에는 병아리를 잡아먹는 솔개보다 훨씬 더 큰 새들의 제왕 독수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더 시간이 지난 뒤였다. 푸른 하늘에 날개를 반듯하게 펴고 아주 고요하게 떠있는 독수리를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매서운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느 먼 장소에 있을 그가 새로이 찾고 있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험난한 산악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하늘 높이 떠올라 날개를 활짝 펴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독수리의 시선이 닫는 곳, 그곳이 어디일까? 이렇게 높고 위대한 존재가 세상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내 작은 세계를 뛰어넘어 더 크고 더 광활한 세계로 다가가는 계기였다. 그 소리 없는 침묵의 세계가 나에겐 문학이었고 소설이었다.
하늘에 유유히 떠 있다가 어딘가로 날아가는 독수리 처럼 소설은 사유와 지성의 눈으로 꿈과 이상의 새로운 지평선을 찾아 더 광활한 세상의 끝을 향해 날아간다. 그것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이 아니라 아무 실체가 없는 꿈이라 해도 분명 그것을 향해 나의 소설은 날아갈 것이다. 그 끝에서 절망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눈은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날갯짓하는 동안 꿈을 꾸며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어설픈 꿈으로 설레기도 하고 고지식한 희망으로 벅차기도 했지만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그게 얼마나 두려운 고통인지를 깨달으며 스스로 자괴감에 슬프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다시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내 소설의 새로운 지평선은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그 끝없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몇몇 문학지에 실었던 단편소설들을 책으로 엮으려니 무심히 간과했던 기억들이 마치 물속에 잠겨 있다가 떠오르듯 서서히 생경하게 부상한다. 과연 이 스마트 스피드 시대에 책을 읽을 시간도 의지도 부족한 세상에 이런 고전적 방법으로 책을 만들어 내놓는다는 게 정말 그럴 가치와 필요가 있는 일인지 혹 문화 쓰레기로 넘쳐나는 이 어지러운 시대에 한 번 더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일은 아닌지 사뭇 우려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내 사유의 흔적 같은 나의 작은 이야기들을 마땅히 책으로 엮어야 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용기를 낸다.

 

 

책 속에서

 

차라리 잘된 일이다.
범행의 모든 증거를 찾아 놓고도 다시 재수사하는 민용익 검사는 드디어 커다란 위업 하나를 달성한 양 회심의 미소까지 지었었다. 사실 내가 모든 범행을 이의 없이 순순히 시인하니까 초강력 범인의 대답이 너무 싱겁다는 듯 그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재차 범행에 직접적인 동기와 목적을 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차마 내가 말을 할 수가 없 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가 저지른 그 범행 자체를 이미 내 기억에서 완전하게 지워버렸다. 그래서 그 일은 마치 꿈속에서조차 없었던 일이라고 믿고 있어 아무리 그들이 나를 추 궁해도 별달리 말이 나오질 않는다.
사실 범행 당시는 더 이상 염치없이 이 세상에 존재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 일을 끝내고 바로 죽을 작정이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은 것이다. 우선 내가 저지른 더러운 흔적들을 깨끗이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시나마 내가 존재했던 이 세상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마지막 의무이자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늦게 돌아와 어떤 소리 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문틈에 스티커를 붙여 꼭꼭 막아놓고 오로지 이 모든 흔적 제거 작업을 새벽까지 은밀히 진행했다.
마침내 나의 이 범행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웠다는 생각이 들자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까지 이 일에 몰두 하는 내 자체가 오히려 싱겁고 우스워지기까지 했다. 이젠 식사도 제대로 하고 아무 거리낌없이 잠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든 내 범행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역겹고 솔직히 살아 있다는 게 구 차스럽기만 하다. 하긴 난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작가의 말

 

끝없는 정적의 수평선
에덴의 정원사들   
불만의 가을   
등잔봉   
결빙(結氷)   
비열한 오후  
전쟁과 소년  
파주로 간 소녀  
평범과 비범  
변심(變心)   
이방 여자들  
남는 장사, 밑지는 장사

함계순

 

1969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06년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영어교사 정년 퇴임
2000년 월간 『수필문학』에 「짠지와 오이지」로 수필작가 등단
2004년 『한맥문학』에 단편소설 「동대문 뷔페」 신인상 으로 소설가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국제펜클럽 회원

 

저서
수필집 『작고 잔잔한 풀꽃들』(교음사)
소설집 『동대문 뷔페』(월간문학 출판부)
장편소설 『운향의 사랑』(문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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