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매번 시집을 낼 때마다 다음 시집은 4, 5년 간격을 두고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매번 지켜지지 않았다. 걸음이 느린 탓이다.
시선집의 출간은 지난 시작詩作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나를 확인하는 자리인 만큼 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천천히 걸어가기로 한다. 성급하지 않게, 부산하지 않게 나만의 보폭으로 길을 만들어가기로 한다.
2020년 1월 김성조
□ 본문 중에서
*뜰을 하나 가지고 싶다
뜰을 하나 가지고 싶다 앵두꽃 향을 사르는 햇살 속 참새 두어 마리 꽃잎 쪼다 가는 뻐꾸기 해울음 따라 걸어도 좋을
구름 산 헤쳐 올 벗 두지 않겠다 빈 식탁 촛불 밝혀 차 따르지 않겠다
기다릴 이 없으니 해 길지 않다 골골이 바람 일어 흔들리는 산
뻐꾸기 한낮을 울다 가면 온종일 혼자인 뜰
*나무나무 2
죽어서도 숯불로 살으리 살 끝 에이는 바람언덕 낮은 지붕 저녁연기 태우며 가시넝쿨 돌산 오르는 저 나무나무들 봄이 와도 살 속 고드름 풀리지 않아 개나리울타리 젖은 옷 널어놓고 풀포기 뜯으며, 뜯으며 바람별 태우고 있는
아침은 늘 비구름 뒤에야 왔다 지친 눈 뜨기 전 잠시 비 뿌리다 가는 햇살 더불어 산다지만 저 햇살 속 등짐 허리 휘게 지고 가는 미역장수 대신 누가 짐져줄 것인가 이 봄날에 한나절 햇살로도 태울 수 없는 속살 불붙지 않는 속살 그 여린 줄기로 산길이든 들길이든 자갈길이든 제 나름의 길을 열어 강 건널 뿐
등 붙여 다리 쉬지 못한 구름처마 밑 일생을 모퉁이로만 돌고 돌아 무딘 손마디 목울대로 징검다리 살얼음 부수며 가는 골짜기 깊은 억새바람 삭이는 눈발 세찬 언덕 저 나무나무들
*불의 환幻 1
-바람 속으로 걸어가다
나는 한 올 풀잎 오늘도 바람 앞에 선다 바람 속에 나를 놓아 부대낄수록 뜨거워지는 피 바람 앞질러 바람이 되어 버린다
나보다 먼저 나를 알아 등짝 후려치는 날 사르고 또 피어나게 할 살 끝 가지가지 가시 풀바람
돌을 안고 개울 건너는 꿈자리 푸르다 어머니 청수 물 달 지고 뜨고 감기 끝 그리움 병 도지듯 실버들 푸른 핏줄 햇살 돋아나 돌아보지 않아도 부끄러운 4월 꽃으로 피어도 좋을 흙으로 누워 있어도 좋을 아, 이리 눈부신 첩첩 불꽃 길
이번 시선집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길을 잠시 묶어둔 채, 뒤로 돌아가 지난 발자취들을 돌아보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고 반성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다. 이른바 초심으로 돌아가 겸허하게 시 앞에 서고, 또한 잊고 있었던 혹은 퇴색되어가는 낯설고 울퉁불퉁한 길들을, 쉽게 만족해가는 메마른 내 일상의 정수리에 옮겨놓고자 하는 것이다.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했지 지난 걸음에 대한 차분한 검토와 성찰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빈 마음으로 걸어온 발자취를 천천히 따라 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걸음들 위에서 생동하는 언어, 새로운 시 세계의 모색이라는 다소 비장한 열망을 품어본다. 그리하여 어설프고 부끄러운 내 ‘흔적’이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되었다.
- 후기 ‘섬’을 찾아가는 영혼의 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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