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세상의 모든 꽃이 저마다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신에게 몰입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눈부시게 집중한 탓이리라. 다른 꽃들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 저러한 말을 염두에 뒀더라면 훨씬 풍부하고 의미 있는 만남이었을 것이다.
동서양 사상의 극명한 차이는 수직과 수평으로 보인다. 서양사상은 한마디로 절대자의 명령에 순명함으로 주종관계가 뚜렷하다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사상이 주류이다. 동양사상은 어떠한가, 사십여 년 넘게 필자가 읽고 메모해 둔 기록에 둔 자료의 근거로만 볼 때 수평에 가깝다고 보인다.
주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한 이후 주나라의 건국이념과 국가 운영의 근간이 담긴 『서경』을 비롯해 『시경』만 보더라도 주 왕실과 제후국들 사이에는 어떠한 긴장의 관계도 읽어 낼 수가 없다. 주 왕실의 붕괴로 인한 춘추시대에 접어들자 제자백가가 출현한다. 바야흐로 시의 시대에서 춘추, 즉 역사의 시대로 접어든다. ‘자신의 얘기 좀 들어보라!’는 외침이 대륙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그중에 유독 공자가 창시한 유가사상이 눈에 띈다. 이 당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외친 묵가사상과 유가사상에 반기反旗를 든 노장사상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훗날 한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로 국가 통치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된 유가사상, 어딘지 모르게 엄숙함과 목에 힘이 들어간 기득권 세력들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 듯하다.
노자와 장자를 읽어 나가면서 늘 필자의 마음을 흔들던 생각이다. 말의 진실은 늘 거짓과 참의 중간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드러냄과 감춤도 마찬가지이다. 겸손은 감춤에서 자라나고 최고의 순간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호랑이 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무늬는 안에 있다.’라는 말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유가의 드러냄과 도가의 감춤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노장사상을 따르던 자들은 유가사상에 대해서 ‘짚신에 구슬감기요, 돼지 발톱에 봉숭아 물들이기’라고까지 비아냥댔다. ‘적게 소유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갖고자 하여 더 가난한 자가 속출하게 만든다.’고 설파하는 도가사상은 매력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천하의 세를 잘 아는 것이 최상이고, 행·불행이 다음이며, 시비는 최하이다. 세는 구도나 추세를, 행·불행은 국면이나 상황을, 시비는 도덕적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다. 꽤 익숙한 말이다. 그래서 현실의 윤리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유가사상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에는, 계간 《하나로 선 사상과 문학》에 8년간 기획 연재했던 글을 크게 수정·보완하였다. 『외줄 타는 장자』 고전 부분은 40여 년 전부터 읽어왔던 고전 중 중요한 부분은 별도의 이면지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던 자료를 활용했다. 이 글의 물꼬를 터주신 문학사의 박영률 주간님과 이 책 발간에 선뜻 나서주신 도서출판 ‘청어’의 이영철 소설가에게 감사드린다. 좋은 벗은 달을 대하는 것과 같고/진기한 책 읽는 것은 꽃 보는 것과 같네. -득호우래여대월/유기서독승간화 得好友來如對月/有奇書讀勝看花
■ 본문 중에서 성인은 ‘나누지 않고 그칠 줄 안다. 성인이불할지지聖人而不割知止.’라고 하겠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흑백, 영욕 등을 함께 껴안을 때 갓난아기의 상태, 무극의 상태, 통나무樸의 상태가 된다. 나아가 장자는 이것저것을 분별하는 시비를 넘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적 용庸에 안주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것을 일러 ‘밝음明’이라 했다.
공자의 제자인 상계가 “왕태란 사람은 불구인데 어찌 많은 제자를 거느릴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육체를 지니고도 어찌 정신을 올바로 지닐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 “심호무가… 명물지화 이수기종야審乎無假… 命物之化 而守其宗也.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 사물의 변화를 운명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 공자의 대답이다. 그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다. 나아가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아 의연할 뿐 아니라,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준다. 간디가 밝힌 ‘진리파악운동 또는 무저항 불복종운동’의 원형을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장자가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데 초楚 위왕威王이 두 명의 대부를 보내서 장자를 재상으로 삼겠다는 뜻을 전한다. 장자가 말하길 “초나라에는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데 죽은 지 3천 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왕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보관하고 있다던데, 나는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습니다.”라고 했다. 비록 진흙 속이라도 초연하게 살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일화이다.
장자는 예禮에 묶여 사는 상태를 하늘의 형벌로 인식하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참으로 군자다운 사람이다. 라고 한다. 상스런 사람들이란 이 세상의 척도로 잴 때 이상할 뿐이지, 하늘의 척도로 재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하늘의 사람들, 즉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공자의 입을 빌려 일러주고 있다. “후연열자 자이위미시학이귀…어사무여친 조탁복박後然列子 自以爲未始學而歸…於事無與親 彫琢復樸 그 후 열자는 자기의 배움이 시작조차 안 되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깎고 다듬는 일을 버리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로 살았다.” (...)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고 호인과 불호인을 가르는 일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초월했다는 의미이다. 깎고 다듬는 ‘인위의 세계’에서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다듬지 않는 통나무樸’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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