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발견하고, 지혜를 실천하고픈 사람들에게 바치는 책
인간은 양식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한 먹거리로 밥 등을 말한 다, ‘곳간 양식이 텅 비어 있다, 당장 저녁 양식을 구해 와야 한다.’ 할 때의 양식이다. 입으로 먹고 위에서 소화시켜 영양분을 장에서 흡수한다. 이 영양분은 육체의 신진대사 자양분으로 쓰인다. 육체를 보다 강하게 한다. 인간이 생물 유기체임을 확인시키는 근거다. 다른 양식이 있다. 개인이나 사회 발달 또는 발전에 양분이 되 는 요소로 지식, 사상, 문명 등이다. 독서, 자연, 경험 등으로 물질과 비물질 모두를 포함한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고 자연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양식이다.’의 양식을 말한다. 눈 등 오감으로 느끼고 뇌리에서 소화시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이 양식을 통해 인간은 남과 사회를 배려하는 행동을 한다. 인간이 사회 유기체임을 확인시키는 근거다. 인간에게 필요한 게 또 있다. 육체의 힘과 정신의 힘이다. 육체 힘은 스스로 몸을 움직이거나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근육 작 용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의 힘이다. 이 힘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정신의 힘은 사물, 이치 따위를 알거나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른바 사고력, 상상력 등이다. ‘지성의 힘을 길러야 하고 사리분별의 힘도 있어야 한다’의 힘이다. 일부 영장류에는 본능적 힘이 있지만 학습되지 않는다. 인간만이 보유한 천혜(天惠) 가 아닐 수 없다. 인간만이 정신적 양식과 정신의 힘을 가진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 이유다. 인간은 물질적 양식과 육체의 힘을 바탕으로 정신적 양식과 정신의 힘을 길러 동물적 야만에서 해방되고 진화를 거듭한다. 이른바 지성인이 된다는 얘기다. 양식과 힘을 하나의 단어로 함축하면 무엇일까? ‘알 지(知)’가 아닐까? ‘知’는 ‘화살 시(矢)’와 ‘입 구(口)’로 이뤄졌다. 화살과 입, 참으로 오묘한 조합이다. 화살과 입이 어찌해서 ‘알다’라는 글자 를 만들었을까? ‘화살’은 먹거리, 양식을 구하는 도구다. ‘입’은 그 먹거리를 먹는 신체 일부다. 굳이 ‘지’를 설명하자면 ‘화살로 잡아 온 먹거리를 입으로 먹고 육체와 정신의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양식, 먹거리가 중요했다. 정신적 양식은 그다음이었다. 먹거리 수렵을 위해 원시인들은 도구가 필요했다. 돌멩이, 몽둥이 등 말이다. 이 원시적 도구로는 아무래도 수렵에 모자람이 많았다. 먹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더 많은 먹 거리가 필요했다. 이보다 정교하고 효율적인 도구가 없을까? 화살이 만들어졌다. 삶의 경험에서 보다 진화된 사냥도구를 탄생시켰다. 그 화살은 돌멩이 등보다 손쉽게 먹거리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주먹 힘보다 머리 힘으로 먹거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시행착오에서 터득한 앎, ‘知’ 덕분이었다. ‘知’와 잘 어울리는 글자는 무엇일까? ‘知’와 비슷한 의미인 ‘알 식(識)’과 ‘슬기로울 혜(慧)’다. ‘식’은 ‘알다’를 강조하기 위해 붙여놓은 글자라 보면 맞다. 반면 ‘혜’는 의미가 더 심오하다. ‘慧’는 ‘빗 자루, 비로 쓸다 혜(彗)’와 ‘마음 심(心)’으로 구성된 글자다. ‘彗‘는 ‘빗자루로 잡생각, 그릇된 지식이나 정보 등으로 뒤죽박죽된 정신을 깨끗이 쓸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뒤죽박죽의 정신은 무지(無知)를 뜻한다. 이런 무지를 없애기 위해선 배움이 필요하다. 배움은 새로운 지혜를 얻는 정신적 행위다. 무수한 지의 편린(片鱗)을 획득해 서로 연관성을 분석하고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사고 과정이다. 결국 인간은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갖는다. 지혜로운 자는 ‘知’를 먹고 ‘慧’를 낳는다. ‘慧’는 ‘知’의 열매다. 밥통만 채우고 육체적 힘만 기르는 사람은 금수에 지나지 않는 다. 머리도 채워야 하고 정신적 힘도 길러야 한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로운 인간)답게 말이다. 머리를 채우고 정신의 힘을 기르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독서다. 책 읽는 것 말이다. 만여 원만 투자하면 무수한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화살로 먹거리를 잡는 것처럼 책으로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 책은 3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나를 찾아서’다. 과학문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왜 인간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살아가고 있는가? 무한 경쟁에 내몰려 자신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자기 성찰은 포기한 지 오래다. ‘사회적 사실과 지금’이라는 굴레에서 헤 매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적었다. 제2장은 ‘세상을 찾아서’다. 인간은 서로 부딪기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삶을 형성한다. 이런 과정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세상 이 굴러가는지,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를 찾아보았다. 제3장은 ‘지식을 찾아서’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지식이 부족하다. 아는 척만 할 뿐이지 실속이 없다. 있어도 말초적이고 얕고 일회성 지식이다. 여과되지 않고 질박(質樸) 한 정보가 많다. 헛똑똑이다. 왜 그렇고 어떻게 해야만 지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적었다. 이 책을 통해 ‘나를 찾고, 세상을 찾고, 지식을 찾아’ 인문학적 상상력을 얻었으면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충북지역 일간지 중부매일에 게재한 칼럼을 재구성하고 보충했다. 지식의 한계로 출처가 재인용된 부분이 있고 인터넷 자료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밝힌다.
책 속에서
현대인들은 생각에 몰두하지 않는다. 골치 아파 뇌를 쓰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아니 누가 또는 사회가 대신 결정하고 선택하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인간은 골 비게 살고 싶고, 사회는 사람들의 골을 비우는 데 서슴지 않는다. 선택과 결정에서 벗어나 두뇌를 쓰지 않으면 일순간 편리하다. 그러나 두뇌, 골수를 좀 먹는 독소가 알게 모르게 침입한다. 불행히도 인간은 편리함에 취(醉)해 이 독소가 자라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결정 장애자가 증가한다. 이젠 심각한 사회 병리현상이 됐다. 자고로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라고 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호모 포노 사피엔스 (Homo Phono Sapiens)’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류 또는 스마트폰 없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걸 힘들어하는 인류’가 ‘지혜로운 인류’를 대신하고 있다. 이른바 ‘스마트 폰 사회’가 도래했다. 스마트폰은 일정 부분 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한 것은 맞다. 사회가 ‘스마트’해지면 인간도 ‘스마트’해질까? 사람들의 두뇌도 똑똑해지고 현명해지는가? ‘Smart(스마트)’는 형용사로 ‘현명한, 머리가 좋은’ 등의 뜻이다. 동사로 쓰면 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면 손과 목 등이 쿡쿡 쑤시고 아프다. 두 뇌도 고통을 받아 골이 빈다.
더는 디지털 문명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많은 것을 잃고 그냥 간다. 이제 상실한 골을 되찾아야 한다.
방법은 기계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자.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가 되어 보자. 그럼 상실하고 챙기지 못한 것들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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