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나는 글밭 가꾸는 농부다. 부지런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건 참 우연한 일이다. 30년 전 남편의 엄청난 교통사고로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부터다. 새파란 35세의 아이 같은 어른인 나는 머리를 크게 다쳐 백치가 된 남편과 어린 남매의 보호자가 되었다. 내 인생에서 그 구간은 참으로 쓰디쓰고도 혹독했다. 밤낮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눈물 바람으로 헤매던 어느 날, 나는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노트를 펴놓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서럽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그렇게나마 쏟아놓고 싶었다. 고통의 무게가 짓눌러오면 나는 무언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그때마다 노트를 펼치곤 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글쓰기는 내게 숨구멍이었고, 위로였고, 또 다가올 하루를 버티어낼 에너지였다. 만 8년여의 긴긴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오랜 담금질 끝에 건져 올린 어쭙잖은 글쓰기는, 나를 세상 밖으로 인도하였고 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새 글밭에서 일한 지 어언 2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나름 자갈도 고르고 잡풀도 뽑아주지만 여전히 나는 어설픈 농부다. 오래전부터 틈틈이 써 온 글들을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퇴고와 편집을 하다 보니 고향 바라기 아니랄까 봐 여러 편의 글에서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들이 스쳐있다. 어두운 글은 빼버렸지만 상흔이 묻어있는 글도 더러 눈에 띈다. 오래된 글도 몇 편 욱여넣었다. 막상 내 언어로 된 수필집을 세상에 내놓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이 기쁨을 평생 내 그림자로 살아온 작은언니와 사랑하는 딸, 아들, 그리고 새 가족이 된 사위와 함께하고 싶다. 끝으로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적시는 따뜻한 글이었으면 좋겠다. 2023년 가을 김영애
■ 본문 중에서 *연어 닮은 여인
시내에 가는 길, 큰 도로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향순이를 보았다. 잠시 기다리다가 합류했다. 마침 같은 방향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중에, “많이 바쁘지? 건물까지 장만하고 대단해.” 라고 말했더니,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이 정도도 못살면 어떻게 해~” 약간 톤을 높여 조금 행복에 겨운 듯 답하며 향순이는 활짝 웃는다. 그녀는 시내에서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함께라고는 하지만 남편은 또 다른 일을 별여 놓아 혼자서 식당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하고 있다. 일에 시달려서인지 화장기 없는 깡마른 얼굴엔 주름이 많아 자신의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였다. 새삼 옛날이 떠오른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인 그녀와 나는 동향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읍에서 조금 떨어진 면 소재지가 그녀와 내가 유년을 공유했던 어릴 적 공간이다. 150여 호나 되는 시골치곤 꽤 큰 동네였다. 우리 집과 그녀의 집은 동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었다. 거리상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작은어머니 댁이 그녀 집 근처라서 또래 사촌하고 놀다가 자연스레 같이 어울리곤 하였다. 당시 어린 나는 그녀의 불행을 알아채지 못했다. 토담 한쪽이 길 쪽으로 허물어져 내린 오두막에서 할머니와 위의 언니랑 세 식구가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만 얼핏 했을 뿐. 가끔 집에서 부모님이 그 집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주워들었지만 어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뿐이었고, 성인이 되어서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외할머니와 당시 청소년인 외삼촌 두 명이 사는 오두막에 언니랑 얹혀살고 있었고, 그런 친정에 그의 어머니는 어린 자매를 버리듯이 내맡긴 채 객지로 떠도는 밤의 여자였던 것이다. 해마다 춘궁기만 되면 먹고 살길이 막막한 그녀의 할머니는 당시 풍족했던 우리 집에 와서 울며 하소연하였다. 안방 아랫목에 나란히 앉아 나지막이 얘기하시는 부모님 목소리와는 달리, 윗목에 앉아 울음 섞인 큰 목소리로 침을 튀며 이야기하시는 괄괄한 성격의 그 할머니가 무서워서 나는 다른 방으로 피한 채 두 귀만 쫑긋 세웠다. 당시 그 할머니의 행동이 너무나 당당해서 부모님이 큰 잘못을 한 줄 알고 잔뜩 겁을 먹은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자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사촌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서울로 돈벌이를 떠났다고 했다. 그 후 그들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아마도 40여 년의 세월은 족히 흘렀으리라. 상처와 서러움으로 뒤 범벅일 기억 속 어린 시절임에도 수 없는 세월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다시 연어처럼 찾아든 걸 보면 조금이나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았던 걸까. 내 나이 50을 갓 넘겼을 무렵,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동네 신경외과였다. 허리가 아파 치료차 외과에 갔다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2인실 방으로 들어갔다.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선이 또렷한 그녀를 보자 옛날의 향순이가 떠오른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분명 그녀일 거라 확신하였다. 궁금증 발동으로 참을 수 없던 나는, “내가 실수하는 건지 모르지만 혹시 예전에 ○○에서 살지 않았느냐”고 운을 뗐다. 맞는다고 했다. 내친김에 다시 물었다. “이름이 향순이 아니냐”고, 역시 맞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길눈 어두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에 큰 특징이 없으면 안면을 튼 정도의 사람조차 긴가민가 헷갈려 실수 연발인데. 더구나 어릴 적 모습도, 젊음도 가셔버린 세월의 뒤안길에서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자주 만나는 사이일수록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은데 자리는 깔렸지만 화제 빈곤이었다. 겨우 사는 곳과 아이들이 몇이냐는, 극히 기본적인 이야기만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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