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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영감님
심규식
창작집
신국판/292쪽
2020년 11월 20일
979-11-5860-910-8
15,000원

■ 작가의 말


직박구리를 지켜보며 한 철


지난 6월 중순쯤 서재 바로 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재 창문을 열고 보니, 창 밖에 서 있는 단풍나무 가지 위에 어떤 놈들이 둥지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단풍나무는 창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서재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지경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직박구리 부부가 나뭇가지나 마른 풀잎 등을 물어다가 둥지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직박구리 부부는 마치 아침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이라도 된 듯 이른 아침이면 매일 시끄럽게 울어 나의 잠을 깨웠다.
직박구리는 참새보다 몸집이 약간 크고, 제비처럼 날씬하며, 몸은 전체적으로 회갈색을 띠고 있다. 눈 밑으로 검고 큰 점이 있고, 부리는 붉거나 검은 색이다. 나무 열매나 음식 찌꺼기, 곤충, 채소 등을 먹으며, 겨울이면 남쪽으로 이동하는 놈들도 있으나,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사는 텃새이다. 지난 겨울에도 우리 집 감나무 가지에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몇 개의 홍시를 직박구리가 찍어먹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직박구리가 혹시 인기척에 위험을 느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까 봐 그 후로 아예 창문을 열지 않고, 마당에 나가서도 그쪽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6월 말 경 직박구리는 4개의 앙증스런 알을 낳았다. 그리고 두어 주일이 지나자 4마리의 직박구리 새끼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직박구리 부부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이느라 열심히 둥지를 드나들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둥지를 내다보면 털도 덜 난 직박구리 새끼들은 커다란 입을 쩍쩍 벌리며 어미가 먹이를 먹여주길 기다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어린 아이들이 모두 다 예쁘고, 청소년들이 그렇게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 다 귀하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애처롭다. 내 집을 찾아온 동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직박구리 새끼 4마리가 아무 탈 없이 자라, 가능하다면 다시 우리 집 나무에 둥지를 틀고 우리 집 식구로 살기를 바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등단하고 작품집도 낸 동료 소설가가 있었다. 나와 나이도 같은 젊은 그가 나는 몹시 부러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절필을 하고 일체의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다. 잠깐 슬럼프가 왔나 했더니, 아예 글쓰기를 포기한 것이다. 한참 후 나는 그에게 이제 작품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가 “어차피 거짓말인데 그깟 거짓말을 위하여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고 밤잠을 설칠 필요가 뭐 있느냐.”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잠깐 우두망찰, 할 말을 잃었다. 소설에 대한 그의 가치관에 대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설마 작품집까지 낸 그의 소설관이 그럴 리가 있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그가 소설에 대한 그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과정의 너무 힘든 고통 때문에 소설을 그만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애써 창작한 작품이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또 현실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별 도움도 못 되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나는 소설이란 것에 가치를 두고 근 50년 소설을 써 왔으나, 세인이 놀랄 만한 문제작이나 역사에 남을 대작을 써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소설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소설을 짝사랑하고 있으니, 이 또한 타고난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앞으로도 힘 닿는 대로 작품을 쓰려 한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내가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그간 가족들과 스승님들, 동학, 후배 여러분의 사랑과 가르침, 배려에 힘입어 오늘의 내가 있음을 새삼 느끼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초가을 삼가 저자 씀

 

 

■ 본문 중에서

 

우리 시대의 영감님


1.
사람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이란 말을 하는데, 김치권 검사는 우선 누가 보더라도 과연 빼어난 인물입니다. 185센티미터의 헌칠한 키에 얼굴과 풍채는 그 누구냐, 미켈란젤론가 뭔가 하는 사람의 조각 있지요. 다윗인지 데이빗인지 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영웅 말입니다. 목동 노릇을 하다가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 하나로 때려잡아, 나중에 왕까지 되었다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하기야 그 다윗이란 사람의 그림이나 조각도 여럿이라 어떤 것은 양가죽을 뒤집어 쓴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것도 있지요만, 하여튼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미남 중의 미남 아닙니까. 김치권 검사가 그 다윗에 버금간다 하면 조금 과장이 될지 모르지만 누구나 한번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용모를 지녔습니다. 게다가 얼굴 속에 전등을 켜 놓은 것처럼 귀티가 나서, 가히 보는 사람들의 혼줄을 흔들어 놓습니다요.
게다가 더욱 백미인 것은 김치권 검사의 언변입니다. 중후하면서도 둥근, 아름다운 목소리는 정말 뭐라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의 매력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가 아나운서나 성우(聲優)를 했으면 더 나을 걸 그랬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합니다. 김치권 자신도 그러한 자기 목소리에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는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언변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원고 없이 그냥 말을 할 때엔 ‘에! 에!’ 하는 간투사가 들어가기 십상이고, 한 말을 다시 중언부언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군소리가 붙기 마련인데, 김 검사는 어쩌면 그렇게 논리도 정연하게 군소리 하나 없이 술술 말이 나오는지, 마치 떡집에서 하얀 가래떡이 솔솔솔 빠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 배가 나오기 마련인데, 김치권 검사는 30대가 되어도 뱃살이 하나도 없어서 영락없이 미켈란젤로의 작품 다윗과 같고, 게다가 미적(美的) 감각이 남달라서 세련된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모델처럼 걷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이 그를 한번 보면 가슴앓이를 안 할 수 없지요. 심지어 남자들도 자기도 모르게 질투가 날 지경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치권은 공부를 잘해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간 한 번도 전교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공부를 잘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강한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김치권과 함께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석해종이란 학생이 있었는데, 한 번도 김치권을 이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다 한두 과목 그보다 몇 점 더 받은 적은 있었지만, 전과목으로 석차를 내면 언제나 김치권이 1등을 했고, 따라서 그의 동급생들은 누구나 그를 확고한 제1인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석해종은 김치권을 그의 라이벌로 보고 그 나름으론 제법 해본다고 했지만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할까요. 늘 2인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너무 터무니없는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삼국지를 보면 당대의 귀재(鬼才)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번번이 패하고 나서 “하늘이 나를 내고 왜 또 제갈량을 냈는가!” 라고 탄식했다는데, 그때 석해종의 심정이 꼭 그랬습니다. 결과적으론 그도 치권이 덕택에 공부를 좀 한 셈이 됐지만.

놀랍게도 김치권은 우리나라의 첫째가는 대학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그가 중고교에서 이름을 날렸더라도 그가 자란 곳은 지방의 작은 소도시라서 전국 1등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난리가 났죠! 난리가! 그 고을 역사상 없었던 일이라며 그런 요란법석이 없었습니다. 거리마다 <경! 김치권 XX대학 수석 합격! 축!>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교장은 물론 시의회 의장, 경찰서장, 시장까지 그의 집으로 축하 인사를 갔습니다. 김치권의 아버지 김희명씨는 황소를 잡아 몇 날이나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제 우리 읍에서도 영감님이 나오게 되셨구먼!”
“치권이가 효자여!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구! 이제 자네도 아들 덕택에 호강을 하게 생겼어! 부럽네, 부러워!”
마을 사람들이 공짜로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그 대가로 김희명씨에게 덕담을 한마디씩 하면, 김희명씨는 벌겋게 술이 취한 얼굴로,
“자식 자랑하는 놈이 팔불출이라는 걸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 치권이 놈이 잘나긴 잘났지! 허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치권이가 효도를 하긴 한 셈이지요.
고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김치권은 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이후 줄곧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군 검찰관으로 병역 의무를 마친 그는 곧바로 부산 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을 받았고, 서울에서 대대로 명문(名門)으로 이름이 난 집안의 영애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역시 잘난 사람이라 보통 사람들과는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장인과 처남들이 모두 정재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작가의 말_직박구리를 지켜보며 한 철  /  4

 

<단편>

우리 시대의 영감님  /  11
통 큰 사람 이태평네  /  43
정난신성대종(靖難神聖大鐘)  /  72
라일락 향기  /  110
석봉 선사 구전(石峯禪師口傳)  /  125
신강정오수도(新江亭午睡圖)  /  166

 

<희곡>

이판본 이몽룡뎐  /  196
정염(情炎)  /  238

 

<꽁트>

닭서리  /  280
덕수 형  /  286

심규식

 

광주고, 공주사범대 국어과, 단국대 대학원 졸업 37년간 공립고등학교 교사, 14년간 공주사범대 강사 역임
1992년 <문예사조> 소설신인상 당선
청구문화상, 충남문학대상, 허균문학상, 한국예 총회장상, 옥조근정훈장 등 수상 다수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충남문인협회, 천안문인협회 회원
<수요문학> <백매문학> <신인문학> 동인

소설집
『그곳에 이르는 먼 길』
『돌아와요 부산항에』
『사로잡힌 영혼』
『네 말더듬이의 말더듬기』(공저)
『우리 시대 영감님』

대하역사소설
『망이와 망소이』(전5권)

자전적 수상록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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