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서
시는 말하기 어렵다. 시와 선은 한 맛이다. 비록 그러하나 불가에서 시는 객진이고 망념이며 장애이다. 옛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우는 이가 언어 문자에 빠지는 것은 마치 그물망에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기를 바라는 일이니, 어리석은 이가 아니라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다. 시는 선과 같으니, 선은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말미암고 시는 신묘하게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얻으면 경율론 삼장교의 문구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쓸데없이 나누는 이야기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마른 똥막대기까지도 모두 선을 나타내는 뜻이 되지만, 마음에 얽매여 근본을 잃어버리면 염화미소의 소식도 모두 교의 자취가 될 뿐이다. 대저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니 그 뜻이 보존된 것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시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말로 드러나는 것으로, 말의 골수이다. 그러므로 그 말에 드러난 것을 보고서 그 사람의 내면에 쌓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바탕이 노래로 발현되어 나온 것이다. 맑고 한가하여 속세의 비린내를 끊어버려야만 귀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본래 시에 능하지 못하고 또 성률에도 익숙지 않아 고금 사람들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였다. 문장은 그 뼈의 기운을 위주로 한다. 기운이 높으면 글도 따라 높아지고 기운이 시들하면 글도 따라 시들하니, 그 시문에 표현된 것을 보면 그 문기의 실체를 숨길 수 없다. 나는 천성이 소루하고 게을러서 진취할 뜻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구하는 것도 없고, 사람에게 거슬릴 것도 없다. 하물며 시를 짓는 일에 더 무엇을 구하랴. 대개 시는 담담한 듯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아름다운 듯하지만 음란하지 않으며, 시의 안목을 세운 것이 진실로 원대하여 읽을수록 더욱 맛이 나니, 옛 스님들은 초연히 현묘한 시법을 깨달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항상 시가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한다고 경계하였는데, 시인은 뜻의 경지가 텅 비어 선을 수행하는데 큰 병통이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시 짓기를 즐겨하지 않고, 또 시문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버려지고 흩어진 것이 이미 적지 않다. 게다가 이른바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말은 당세에 알려지지 못하여 그 행적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마음을 자맥질하여 터득함이 있는 것은 근본이 있는 시문이니, 덕은 없고 문장만 짓는 나 같은 사람과는 거의 한 부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은미한 생각이 온축된 것에 대해서는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점이 있으니, 후대의 안목을 기다린다. 지금 내 자취를 돌아보니 내 뜻을 잃은 지가 거의 반평생이다. 비로소 나의 옛집으로 돌아와 나의 참회록을 썼으나 아직도 지난 허물을 고치지 못해 땀이 흘러나와 등골을 적신다. 아! 이제 졸고를 ‘초명암집’이라 제하여 펴내니 이백육십여 편이 수록되었다. 내 가슴이 두근거려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려워 목 안이 간질간질하여 자주 침을 삼킨다. 다만 천박한 시권은 곧 침 뱉는 그릇일 뿐. 시는 곧 그 사람이라 이는 내 자신을 말한 것이니, 한번 보시고 한번 웃어 주시면 다행이노라. 오직 나는 이 서툴고 비루한 시집이 책벌레의 먹이나 장독의 덮개나 혹은 종이 이불 한 장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걸 원하노라.
알겠는가.
내 손과 부처님의 손 똥 치우는 쓰레받기며 빗자루 집어들자마자 문득 가버리니 누가 앞이며 누가 뒤인가.
내 다리와 당나귀 다리 걸음걸음 밟아나가다가 허공을 밟아버렸구나 마음 내키는 대로.
불기 2564년 중추절, 방장산 초명암에서 원경 합장
■ 본문 중에서
◯ 憎書蠧 책 벌레를 미워해서
書癖化爲爾 글에 미친 네 놈이 변하여 食之亦甘旨 먹어치우고 달게 맛보는구나. 若知當食食 만약 먹어야 할 걸 알고 먹는다면 空字食無止 ‘공’ 자나 그침 없이 먹어라.
◯ 過廣德寺僧塔 ―禪僧石坡入滅後散骨處
광덕사 승탑을 지나다가 ―선승 석파가 입멸한 뒤 유골을 뿌린 곳이다
僧居靑山中 스님은 푸른 산에서 살았지만 僧去山不老 스님은 떠나고 산은 늙지 않았네. 客來無故人 나그네가 찾아왔으나 옛 친구 없어 回頭淚春艸 돌아보며 봄풀에 눈물짓누나.
◯ 留別無相庵禪光 무상암 선광스님과 작별하며 남기다
楓林秋雨晩 저녁나절 단풍 숲에 가을비 내리니 花盡山紅綠 꽃은 다 지고 온 산은 붉고 푸르구나. 客去踏鍾聲 나그네가 종소리 밟고 가버리니 坐羨雲上鵠 앉아서 구름 탄 고니를 부러워하네.
◯ 寓意 뜻을 부쳐
棋上百年客 바둑판 위에 백 년 손님 芥中萬里僧 겨자씨 안에 만 리 수행자. 吸盡虛空處 허공을 몽땅 마신 곳에 翻轉任騰騰 몸 바꾸어 마음대로 다니네.
◯ 氷瀑 얼어붙은 폭포
水落忽變啞 물방울 지다가 홀연히 벙어리로 변해 冷聲黙氷壑 찬 물소리 묵묵히 얼어 벼랑이로다. 不見一點塵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아 無處虛空泊 허공조차 머물 데 없구나.
◯ 淸信女求一偈 청신녀가 한 게송을 구하기에
可笑騎牛子 우습구나, 소를 탄 사람이여 騎牛今覓牛 소를 타고서 지금 소를 찾는구나. 放禪望北斗 선정을 풀고 북두성 바라보니 虛空破碎流 허공이 깨져 흐르고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