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여섯 권째 시집 『당신의 마음은 빈집』을 출간하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셀 수도 없이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 어떤 질문보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어떤 거창한 수식어보다 시가 좋아서 시를 썼다는 것이 나의 명확한 답이다. 길든 짧든, 심오하든 가볍든 그리고 기쁘든 슬프든 시는 나의 삶이었고, 나의 그 자체였다. 여섯 권의 시집을 내도록 내가 쓴 시는 정확하게 1522편이다. 시집으로 발표된 시는 500여 편에 불과할 뿐 대부분의 수많은 시들이 책에 실리지 못하였으니 버젓이 세상에 내어 놓고도 날개를 달아 주지 못한 셈이다. 2020년 6월, 한꺼번에 밀어닥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로 안타깝게도 나의 시는 1500편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백이십여 일 동안 정체되었으나 나의 시는 모두 뜨거운 나의 피였고, 발가벗겨진 나의 살이었다. 자식과도 같은 한 편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그들이 태어난 장소는 그들의 고향이었으며, 첫울음을 터트리며 세상과 첫 조우한 그들이 태어난 시간은 모두 기록되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들의 탄생을 기념해 줄 것이다. 내 가슴 속에서 잉태하여 열 달이 넘도록 가느란 숨을 쉬다가 알토란 같은 신생아로 자라난 아이들은 속 깊은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그 후 내가 언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마치 나의 유언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로하는 소임을 감당할 때면 세상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공석진’이라는 사람을 들추어 내고서 “그래 공석진 시인, 참 좋은 시인이었어.”라고 사뭇 그리워하면서 술잔이라도 기웃거리는 뭇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라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인구 해변 방파제 빛바랜 빨간색 의자와 의자로 사용하였을 통나무가 기울듯 있었다 타인에게 휴식을 주기엔 매우 지쳐 보이는 그들은 한때 절절한 연인이었다 한쪽은 작별을 선언해 버렸고 한쪽은 절반이 잘라진 사랑에서 쏟아지는 선혈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케론강에 빠진 두 사람 죽음을 강요하는 냉혹함에 바다까지 밀려와 물새가 안타까운 듯 떠나지 않았고 파도가 연신 올라와 좋은 날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화해를 재촉하였다 사랑은 기한이 다 된 것인가 우울이 쏟아지도록 유독 화창한 날 하늘과 바다 사이에는 수평으로 선명하게 금이 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별리를 확정지었다 <공석진 詩 「하늘과 바다 사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단언컨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다.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 결별을 사전에 마음의 준비도 하지도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강요를 당하는 일이라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와 가족과의 헤어짐은 물론 매일 보는 친한 지인이나 절절히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이 다 마찬가지다. 특히 하루 아침에 그 결별이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결정이 통보된다면 그 슬픔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 것이다. 나의 시는 결별로 인해 상처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는 진심 어린 위로의 시이다. 하늘과 바다는 평생을 밀착하여 희로애락을 함께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수평선이 존재한다. 평소에는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지만 언젠가 그 선은 더 굵은 선으로 확정되어 분리될 수밖에 없다. 나의 시는 결단코 수평선을 없애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죽어가는 모차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완성해 가던 사자(死者)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진혼곡 레퀴엠처럼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호시탐탐 갈라놓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그 선이 우리들 시야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나는 시를 쓰고 또 시를 쓸 것이다. 평생 눅눅한 감성을 잃지 않았고, 늘 호기심 어린 사차원의 세상을 기웃거렸으며,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을 유지했던 나였고, 보통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동의하는 것들도 “아니다, 아닐 수 있다”라며 강변할 수 있었던 시인 공석진의 용기를 지지해 주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나의 시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는 6집을 발간하는 이 즈음의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극복하고, 한동안의 절필을 접고, 다시 ‘시(詩)’라는 나의 자식을 세상에 내 보내는 데 온갖 열정과 마지막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순간에 등돌리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속성과는 달리 시는 애당초 하늘의 별과의 나와의 만남처럼 그 기적 같은 인연으로 인해 결코 결별할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이 레퀴엠은 나를 위해 쓰고 있다고…”라고 말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말처럼 결국은 나의 평생의 시 창작도 타인의 위안을 빙자한 나의 위안이었음을 고백한다.
■ 본문 중에서 *빈집 같이 가자 어미 없어 동병 앓는 누렁이 재촉하여 언제나 당신이 없는 집을 뒤로 한참을 걸어 길 무덤에 누웠습니다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도록 이내 오지 않는 당신 쓸쓸한 잠에 빠져 당신의 젖무덤을 더듬어 봅니다 이까짓 몸뚱이 잠결에 굴러 무릎이 다 까져도 상관없었습니다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내 없으실 당신 칠흑같이 막막한 이 극한의 두려움도 기약 없는 당신을 무작정 기다리는 그리움만 못하였습니다 집에 가자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지는 채근에 언젠가 당신에게 안기어 배고프다 투정 부릴 빈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강풍에 팔이 잘려 맥없이 매달린 나뭇가지
아팠을 텐데 또 자르고 벗겨 내 채찍으로 쓰이면 본의 아닌 그 죄책감은 누가 위로해 주나 악의 분명한 잔인한 가해는 누가 책망해 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