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매장에서 입어보고 또 입어봐 놓고 망설임 없이 카드를 긁어 사놓고는 집에 오자마자 또 바로 입어보며 어디를 가볼까? 누구를 만날까?
읽고 싶은 책은 많아 마음바구니에 가득 담아놓고 주머니 속 돈 얼마 남았지? 생활비 모자라지는 않을까? 한 권 한 권 내려놓다가 몇 권 남은 책마저 먼지 쌓인 진열품처럼 쳐다보지도 않는 오만함은 또 무엇인가
시를 쓴답시고 나풀거리는 바람만 쫓지는 않았는지 뱃속까지 차버린 세상 허풍이 꺼지는 날에는 시를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술술 쓰여지겠지요
여전히 창밖에는 진눈깨비가 흩어집니다 2024. 12. 진눈깨비 내리는 저녁 김은경
■ 본문 중에서
*기억의 가면 먹물빛 수면의 기억들 말라붙은 침묵 소리 없이 재촉하는 시계 초침
귀를 닫아야만 들리는 소리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세상 마음을 접어야만 읽을 수 있는 진실
억겁을 스쳐 찰나에 만난 페르소나
붉은 악마의 유혹이 시작된다
*일상에서 세상 별것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무게가 덜어지고 깃털이 된 나를 본다 별것 아닌 세상에서 별것인 체하고 살려니 별별 일로 머릿속은 철수세미다 빡빡 닦아 시꺼먼 물 쏟아내 버리자 뚜껑 열어 빗물 한 양재기 햇살 한 소쿠리 웃음은 넘치는 함박으로 옮겨 담아 오늘을 굴려보자
기름 한 방울 없이도 살아가는 인생인데 왜 이리 뻑뻑하게 굴었는지
야! 이눔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되었다네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 동해, 그리고 나는 사진에 담지 말고 마음에 담아주면 좋겠다
파도가 잔잔하면 얇은 미소로 폭풍우 치는 파도는 깊은 울음으로 마주하게
사랑으로 왔다가 미움으로 밀려 나가는 이별로 뭉개진 짜디짠 연주곡 달빛 타고 길게 이어진다
내려놓고 왔다 생각했는데 밤새 밀려오는 그대
■ 해설 중에서 그의 체험은 독자와 공유된다. 모든 인간의 현실이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김은경의 시는 고통에서 희망으로 변환된 환희의 목소리이다. 시적 언어의 표면에서 고통스런 삶을 진술하고, 그 이면에서 절망을 극복하는 비법을 공개한다. 그 비법은 사랑뿐이다. 시인은 소외된 영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싶어 한다. 소통, 공감을 통해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간다. 고로 소통, 공감이 상실된 시는 죽은 문자이다. 죽은 언어는 운동성과 확장성이 없다. 「월세방 706호」를 비추던 달은 희망의 달이다. 그 보름달의 변형체가 김은경의 시 세계다.
—손희락(시인·문학평론가)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