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나는 늘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늘 기도하며 살았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에 사로잡혔었다. 그냥 편하게 살지 무엇 때문에 고뇌하는가 묻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신앙적 고뇌와 성찰의 기도 속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먹고 마셨다. 생은 단 한 번뿐인 마라톤 경기라고 믿고 있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목숨 내놓고 완주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 이는 개인적 철학이며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다.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렸지만 삶의 목마름을 느낄 때, 그때마다 시를 썼다. 그동안 써온 시편들을 책으로 묶는다. 문학성은 부족하지만 삶의 의문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자아 체험에서 깨우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서평을 써주신 손희락 평론가께 감사드린다.
2026년 새해 아침에 송헌(松軒) 허 재
■ 본문 중에서
**무명시인 신고식
허재, 무명 시인이 되었음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와 나의 가족들 나의 친구들에게 신고합니다
조용히 살다가 그냥 가려다가 내 가슴 찔러오던 시가 그리워서 감성 자극, 눈물 흘리던 시가 그리워서 신고식을 치릅니다
퇴역 일자 영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인입니다
**인연의 의미
아내의 귀가가 늦다 벽시계를 바라보며 익숙한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오늘은 무척 그립다
일평생,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의 사랑은 늘 서툴고 어긋나서 그녀를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딩동, 현관 앞에 서서 아내가 웃는다 그녀를 향한 기다림은 첫 만남 이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부의 인연, 기다림의 결실이며 축복이다 그녀를 기다리다 그녀의 미소 속에 잠드는 것이 남자의 운명, 진실한 사랑이다
**눈
눈이 내리면 땅바닥 하얗게 쌓인다고 착각하지 마라 얼어붙은 대지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지는 차가운 입김들도 있으니
오늘 밤 병원 불빛이 유난히 차가웁다 싸늘한 불빛 속에서 흐느끼는 비명소리 들려온다 땅바닥 닿지 못한 채 사라지는 슬픔의 비명이다
대지에 닿아 녹지 않고 이만큼 버티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겨울 햇살에 형체가 변질되어도 우린 감사의 기도 올릴 수밖에 없네
■ 서평
바람이 지나간 자리도 흔적이 남고, 꽃이 피었다 시든 꽃자리도 흔적은 남는다. 생에서 “삶의 흔적”을 망각하면 불행의 늪으로 빠져든다. 시간은 침묵으로 흐를 뿐이지만, 각 존재가 남긴 발자국은 상이하다. 사후세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넷째 연에서 “진정한 흔적”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진정한 흔적은 / 한 줌 바람으로 사라진 후에 / 평가받을 것이다” 깨우친다. 이는 존재의 이력을 총칭한 표현이다. 『삶의 흔적』을 표제로 정한 것은 시적 전략이다. 21세기 시대적 쾌락에 매몰된 독자의 의식을 흔들어보겠다는 야심찬 시도이다. 시인은 시의 언어가 존재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가 종교의 지침서나 경전은 아니지만. 시적 효용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고 믿는다. 고로 허재의 시는 언어유희를 최소화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의 말은 시간의 종착지점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생은 소중하다 / 흔적으로 이어진다”는 시적 목소리는 불변의 진리이다. 모든 생은 발자국이 남는다. 모든 존재는 이력을 남긴다. 통칭하면 <삶의 흔적>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이면서 핵심적 메시지이다.
―손희락(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