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나는 늘 그를 응시한다. 상상의 그이지만, 그도 나를 보며 슬며시 웃는다. 그의 눈빛은 은근하면서도 따뜻하고, 언뜻 냉소가 비칠 때면 섬찟하기까지 하다. 그의 안엔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득하다. 차디찬 슬픔이 어느 땐 내 심장에까지 밀려온다. 나는 착잡하다 못해 슬퍼진다. 나와 그, 이런 상상의 관계, 내게 인간은 언제나 수수께끼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순간에도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우린 어떤 거리에 서 있다. 해가 저물고, 세상은 어둠에 젖어든다. 나는 그에게 어서 안식처로 돌아가라고 눈으로 재촉한다. 그도 내게 어서 들어가라고 채근한다. 헌데 나는 집 대신, 광야로 나 있는 길을 향해 하늘의 별을 보며 터벅터벅 걷는다. 나와 함께 그도 곁에서 걷는다. 그새 우린 발맞춰 걷는다. 밤새 걸어 어느덧 고원의 메마른 산등성이와 돌들과 황막하고도 어두운 하늘이 여명으로 붉게 물드는 걸 바라본다. 오, 바위에 올라앉아 나는 그가 내 일부인 걸 절감한다! 눈에 맺힌 눈물방울, 나는 보았다. 그가 내 영혼의 그림자 같은 투영인걸. 우린 부르르 떨며, 서로를 보며 여명 속에서 깨어나는 사막을 넋 놓고 바라본다. 내 안엔 이미 저 사막이 깨어나는 열기며 ‘향기’로 가득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우린 다시 번잡한 도회의 어떤 거리에 서 있다. 지금은 밤이다. 낮처럼 환한 밤. 하긴 이곳엔 밤이 없다.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를 뿐, 사람들은 낮과 밤을 잊은 지 오래다. 나는 그의 눈 안의 호롱불을 본다. 어둠을 밝혔던 호롱불이다. 예전, 예전이라 해 봐야 불과 수십 년 전, 가난한 방 안의 유일한 불빛이다. 나는 할머니가 들려주던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그 옛이야기를, 그의 눈에 비친 흔들리는 호롱불에서 듣는다. 망각 속의 호롱불은, 어느 순간 나나 그나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환상 속에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호롱불을 잊은 지 오래였다. 모두 새 세상을 만난 듯 가슴이 벅차올랐던 그 전기가 불을 밝혔던 날을 우린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망각과 환상, 저 당연한 불빛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한 이후로 인류가 보인 늘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었다. 벅찼던 기억은, 망각 속에 잠들고, 우린 이렇게 환상 속을 산다. 내 안엔 이런 상흔들이, 우상들이 깊이 새겨져 있다. 부흥, 성장, 발전, 풍요로움! 그는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 때부터 부실한 작품이었어. 안 그래? 성서에 기록된 신화는 그런 슬픈 우화인 거야. 신은 왜 아담과 이브를 위해 손수 만든 에덴동산에 선악과란 나무를 심었을까? 애초 이들은 광야로 추방될 종자들이었던 거야. 그곳을 살만한 그런 능력이나 지혜를 갖지 못한 부실한 종자들. 풍요를 풍요답게 누릴 수 없는 존재, 슬픈 존재들 말야.
나는 그 슬픈 존재, 아니 그를 보며 이 소설을 썼다. 환상 속의 나를 보며.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건 그와 나의 이야기이면서도, 오늘을 사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어쩌면 하찮기까지 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이자 ‘사건’일 것이다. 하긴, 나는 우리의 주인공을 좀 별난 인간으로 그렸다. 한사코 자신의 길, 그 환상 속 유령과 대결하는 길을 택한 그의 서글픈 결말은 어찌 보면 그다울 만치 자명한 것이다. 나는 이 순간 그를 보며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우리가 환상에서 깨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하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 본문 중에서 우리 집 정원에 엄마는 언제나 정원에 서 있는 거예요. 꽃처럼 하얀 모습으로요. 엄마가요. 이 정원 어딘가에 자기가 있다는 거예요. 이 정원 어딘가에. 모르겠어요. 무슨 뜻인지요. 계속해서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 중학교 3학년 때, 가을 수학여행을 갔다 왔어요. 집에요 엄마가 없었어요. 울 엄만 항상 언제나요. 집에서 나를 기다렸거든요. 그날 쫄쫄 굶었거든요. 안 오는 거예요. 엄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로요. 사라진 거예요. 어느 날 그 사람이 혼자 있는 저를 찾아왔어요. 엄마 일은 자기도 모른댔어요. 같이 파출소에도 가고… 혼자니까 진짜 무서웠거든요. 오빠가 저를 그때 지켜준 거예요. 우린 좋아하게 됐구요. 엄만… 실종 신고를 했어요. 오빠랑 그때부터 같이 살았구요. …첫사랑이거든요. 오빠가 자기가 취직할 때까지만 내가 일을 하기로 했거든요. 일을 다 알아봐 줬거든요. 오빠가요… 저는요. 진짜 오빠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다 했거든요.
문득 이 순간 그는 새삼 깨닫는 것이었다. 이 감옥 안에서 그의 어떤 상태가 호전된 건 확실했다. 침식의 규칙성, 인간이란 생물에겐 적절한 강제의 규칙성은, 이렇듯 정신과 몸을 호전시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규칙성의 함몰 상태랄까. 또 밤과 낮의 뒤바뀐 생활, 그 증상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중증일 만치 악화일로였었다. 우선, 뇌의 회로가 예전의 건강했던 어떤 날만큼이나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마냥 그는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앞에서, 사뭇 신기할 정도인 것이다.
타고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옆에서 원고를 읽고 조력을 아끼지 않은 아내 장소영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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