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박종식 작가의 장편소설 『종점에서』는 한 인간이 시대의 폭력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끝내 ‘종점’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생애 서사다. 작가는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던져진다”는 문장으로 삶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독재정권까지 “저승의 문턱을 넘나들며 질경이처럼 살아온” 주인공의 생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는 끈기와 도전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치열한 삶 끝에서 “심신은 이미 종점에 와버린” 현실은 씁쓸하지만, 그가 도달한 깨달음은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남긴다. 전쟁의 잔혹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증언하려는 작가의 진심이 소설 전편을 관통하며, 개인의 생애를 통해 한 시대의 상처와 회복을 그려낸 묵직한 작품이다.
■ 작가의 말
인간이 이 세상에 올 때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던져진다. 그렇게 던져진 하찮은 존재가 살아가는 데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귀하게 왔느냐 천하게 왔느냐는 상관없이 값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삶의 형태가 자신의 의지보다는 주변의 여건이나 환경에 좌우된다. 첫째, 부모를 잘 만나는 것 둘째, 지리나 자연환경 끝으로, 자기가 속해있는 국가의 형태에 따라 개인의 삶이 큰 영향을 받는다.
19~20세기만큼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지속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고통을 받는 때가 없었다. 이 두 세기 동안 민초들은 인권이란 말조차 먼먼 별나라에서나 듣는 말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수탈과 한국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휴전이라는 이름하에 잠정적 총성은 멎었지만, 여전히 폭탄을 머리에 이고 살아오고 있는 현실, 거기에 더하여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질곡의 함정에서 헤매게 되었다. 유년 시절부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승의 문턱을 넘나들며 질경이처럼 살아온 주인공이 우리이다. 그러나 특유한 끈기와 도전정신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경제적 안정을 찾았으나 심신은 이미 종점에 와버린 것이다. 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이루어냈지만, 그가 다리 뻗고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뒷방으로 나앉아야 하는 운명 누구를 탓하랴? 탄생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듯 종점에 이르는 삶 또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생사까지 다 놔버리고 심신의 자유를 찾아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태胎 자리를 찾아간다. 삶이 덧없음을 종점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한 미련만 남는다.
필자가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전쟁의 잔인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전쟁이 없고 영원히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기를 엮어본 바이다.
끝으로 장편소설 『종점에서』를 출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도움을 주신 청어출판사 임직원 제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5년 11월 입동절 전주 장승배기로 길에 쌓인 송화색 은행잎을 밟고 걸으며…
운송 박종식
■ 본문 중에서
마을은 죽음의 도시처럼 불빛이 다 꺼지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은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불길한 조짐을 예고하듯 개 짖는 소리가 저주스럽게 들렸다. 세운네 가족이 벌벌 떨고 있었다. 이때 마당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뜰로 올라오는 발소리와 함께 “동무. 동무. 주인 없소?” 하며 낮은 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대답을 못 하여 떨고 있는데 신발 신은 채 마루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어머니가 잠에서 깨인 듯 목이 잠긴 소리로 “누구요? 이 밤중에….” 하며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불 좀 켜. 큰 소리 내지 말고.”
─본문 38쪽 「검은 파도 앞에서」에서
오전 11시쯤에 멀리서 들려오는 박격포 소리는 전쟁의 서막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전쟁이 끝나간다는 소문이 들려왔는데 그 포탄 소리가 실제로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경고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쫓겨 가는 인민군이나 각 지역에서 인공치하 동안 부역을 하거나 적극 가담하던 자들이 국군의 추격에 쫓겨 산간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쫓겨 가면서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완강히 저항하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 첫 전투가 구림면과 팔덕면 경계에 있는 550고지쯤 되는 무름산에서 일어났다. 그 전투에서 패한 인민군은 뒤로 물러나고 국군이 무름산 아랫마을인 중리로 들어와 먼저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집합시켜 조사하였다.
─본문 50쪽 「동족상잔」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