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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기억
안중익
소설
국판변형/216쪽
2026년 4월 20일
979-11-6855-447-4
16,000원
■ 작가의 말

누군가 왜 소설을 쓰냐고 묻는다면, 대답 대신 소설의 시작의 원점(原點)을 가만히 반추해 볼 것 같다. 그것은 “너는 왜 태어났니?”라는 물음만큼이나 명쾌하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 앞에 서면 늘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씨앗(因)과 햇빛, 물, 흙(緣)이 만나 기어이 꽃을 피워내듯,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이로운 일.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리고 이 글이 누군가의 손에 닿게 되는 것도 모두 그런 귀한 인연이라 믿는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쓴 소설은 편지였다.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6월,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월남전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던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쓰게 되었다. 출석부 명단으로 받은 친구 이름들, 무려 예순 통의 편지. 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빌려 한 달에 한 번씩 정성스레 편지를 썼다.
“국군 아저씨께.”
그렇게 시작된 편지에는 아카시아 꽃향기와 교실 창가의 평화로운 풍경이 담겼고, 어린 마음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었던 전쟁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도 스며 있었을 거다. 다정하게 답장을 보내온 이도 있었고, 끝내 아무런 기척이 없던 이도 있었다. 그중 누군가는 저 먼 타국의 밤하늘에서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자랐다. 그 뒤로 글을 쓸 때마다 내 펜 끝의 출발점은 늘 ‘왜’라는 질문이었다.
왜 우리는 만났고, 왜 사랑했으며, 왜 떠나야 했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온전히 행복하지 못한지.
그 끈질긴 질문들이 인물을 빚어냈고 이야기를 직조해 냈다. 이 책에 묶인 단편들 또한 내가 통과해 온 그 ‘왜’의 시간들이 남긴 무늬이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느끼던 투박한 따스함,
민달팽이처럼 느릿하게 생을 견디던 이들의 발자취,
떠나간 이들에 대한 저릿한 그리움과 염원.
내 미래에 대한 발원.

내 글은 결코 완전하지도, 매끈하지도 않다. 때로는 들쭉날쭉하고 모난 구석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멈추지 않고 흘러온 순간들의 정직한 기록이며, 절대 잊지 않으려 애썼던 마음의 지극한 흔적이다.

글을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닿을 위로를 꿈꾸는 과정인 동시에, 나 스스로를 지키는 숨구멍을 찾는 일이었다. 나의 진심이 타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바란다.

고마운 인연들에게 이 글을 마침표 대신 전한다.

2026년 봄, 
안중익




■ 본문 중에서

*손의 기억

숨소리마저, 금이 간 유리 위를 딛듯 위태로운 중환자실. 창가 4번 침대에 당신의 어머니가 누워있다. 어머니 손을 잡으려다 당신은 멈칫한다. 종아리를 치던 손 위로 열에 들뜬 당신을 업고 병원까지 달리던 손이 겹친다. 그 손을 한 번도 먼저 잡아본 적이 없다.
“어머니…”
조심스레 불러보지만, 어머니는 이미 대답할 기력을 잃었고 당신은 대답을 들을 기회를 놓쳤다. 늘 “나는 괜찮아”라며 자신을 다독이던 어머니가 그렇게 이승을 떠나고 있었다. 당신은 삼도천을 건너는 뱃길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어머니 손을 감싸 쥐었다. 식어가는 온기를 당신의 체온이 아프게 채웠다.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그때부터였던가. 당신의 삶이 어머니의 손을 떠나보내는 아픔으로 얼룩진 것이.

*

여름 내내 더위와 전쟁 중이다. 7월부터 이어진 열대야 때문에 밤마다 잠까지 설친다. TV를 켜도 이상기온이니, 고속도로 정체가 어떠니 떠드는 소리뿐이라 어디라도 훌쩍 떠나 볼까 하다가도 막상 더운 바람 한 줄기만 스쳐도 금세 의욕이 꺾인다. 집 안에만 틀어박힌 지 벌써 두 달,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은 더부룩하고, 기분은 땀 절은 빨래처럼 눅눅하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생수 한 병을 다 마신 당신은 휴대전화를 켜 가족 대화방을 연다.
― 나 이러다 영혼이 증발하겠어. 계곡에라도 데려가 줘.
아이들 챙기며 직장 다니느라 바쁜 세 자식에게 이런 말 하는 건, 어미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속을 털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아 투정을 부려봤다. 그런데 뜻밖에 늘 바쁘다며 톡 확인도 안 하던 막내딸 수지가 답을 띄웠다.
― 이번 주말에 같이 가요. 수박 한 통 사 가지고.
‘얘가 웬일이래?’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다 얼른 손가락을 움직인다.
― 그런 데가 있긴 해? 그리고 너는 바쁘잖아.
잠시 후, 수지가 강한 어퍼컷을 날린다.
― 우리 김 여사가 죽겠다는데, 구급차 타고라도 가야지 어쩌겠어요. 후후.
그 말에 당신은 피식 웃음이 터진다. 화면 속 글자 몇 줄이 방금 마신 물 한 병보다 더 시원하게 가슴을 적신다. 수지 말로는 양평에서 청평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를 달리다 용문산 남쪽 능선이 보이는 용천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십 분쯤 들어가면 당신이 좋아할 만한 계곡이 있다고 한다. 그곳은 폭이 넓고 물도 많아 곳곳에 크고 작은 소(沼)가 있고, 상류에는 고려 말 고승 원증국사의 사리탑이 있는 고찰 ‘사나사(舍那寺)’도 있다며 간 김에 그곳도 들러보잔다.
― 엄마 핑계로 나도 좀 쉬려고요. 토요일 아홉 시, 기사 출동합니다.
다른 두 자식은 여전히 톡을 씹는데, 그래도 막내가 어미 체면을 살려준다. 수지는 물이 철철 흐르는 계곡과 절 풍경을 찍은 영상까지 올려준다. 고즈넉한 사찰 풍경, 그 옆으로 쏟아지는 물소리에 당신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당신은 수지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오케이’ 이모티콘을 띄우고 한 줄 멘트까지 날린다.
― 좋아. 수박은 내가 사 가지.
■ 차례



작가의 말   015

서시序詩   019
런던의 두 퀸   014
친구 밥상   046
쉿, 비밀이야   074
워리 비 해피   100
손의 기억   124
아스팔트 위의 민달팽이   148
그들의 이소(離巢)   168
무대가 열리고 불이 들어오면   192

안중익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며 번역서와 불교 서적, 큰스님들의 저서를 출간해오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시와 소설 공부를 시작, 2020년 《한국소설》 신인상에 단편소설 「반야용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함. 

차기작으로 쓴 단편 「문턱」이 KBS라디오 문학관 드라마로 선정되었고, 그 후 「문턱」을 극본으로 각색하여 제7회 <늘 푸른 연극제>에 참여 <겨울배롱나무 꽃피는 날>로 국립정동 세실극장에서 공연. 2025년 광주, 영광, 인제, 양구에서 재공연 됨
소설집 『반야용선』, 『손의 기억』
희곡집 『겨울 배롱나무꽃 피는 날』
공저의 동화집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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