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윤 작가와 오래도록 함께 문학 공부를 해오면서 그가 제주에 산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인 것은 등단할 때까지 몰랐다. 그의 소설 속엔 의료기구를 사이에 두고 환자의 몸을 진료하고 치료하는 의사보다, 아픈 사람의 몸과 직접 대화하고 교감하듯 손으로 이곳저곳 만지고 주무르며 치료하는 물리치료사가 더 많이 등장한다.
진료실 안이든 바깥이든 손과 몸의 만남은 늘 아슬아슬하다. 윤호준의 소설은 손과 몸의 만남을 치료와 추행의 경계, 위로와 위험의 경계 속에 오해와 이해의 넘나듦으로 확장시켜 자신이 끌고 가는 이야기의 의미를 증폭시키고 독자들에게는 또 그런 긴장 속에 독서의 재미를 배가시켜 선사한다.
작품의 소재와 결도 다양하다. 제주도의 아픈 현대사에서부터 표제작이기도 한 「행운반점 12·3」에 이르기까지, 대저 나라의 정치라는 게 국가적 운명의 흐름에 그치지 않고 시민 개개인의 먹고사는 문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반점 내부의 풍경만으로도 큰소리 내지 않고 울림으로 전달한다. 이렇듯 그의 세상 바라봄이 작품 곳곳의 손길처럼 여러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고도 따뜻하게 빛난다. 이것이 작가로 타고난 그의 재주고 솜씨다.
■ 본문 중에서
행운반점 12・3
제주 시내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를 벗어나 한라산 방향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나온다. 둔중한 문자가 새겨진 간판 아래로 생경한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알싸한 향신료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곳. 잠시 낯선 나라의 변두리로 순간 이동한 듯한 착각이 든다. 어색함을 견디며 걷다 보면 후미진 골목이 보이는데, 그 구석에 4층짜리 건물의 입구가 숨어 있다. 3층에 주연 다방을 품은 낡고 오래된 건물. 엘리베이터가 없어 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내가 주연 다방을 좋아하는 까닭은 장소가 한적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드물고, 팔 길이보다 긴 수족관이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둑하고 서늘한 그곳이 달나라처럼 밝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데에는 수족관의 영향이 크다. 수족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물고기들을 관찰하면 지긋지긋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개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녀석은 입술을 내밀고 유영하는 은빛 물고기, 키싱구라미다. 커다란 입술로 다른 키싱구라미와 키스하는 열대어.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도 따라 죽는다고 영화 쉬리에서 여주인공은 말했다. 먹지 못해 말라 죽기도 하고, 비늘이 벗겨지고 배에 물이 차 죽기도 한다고…. 하얀 수초 사이를 오가는 키싱구라미 앞에서 배우 한석규와 김윤진이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뛰게 하는 명장면이다.
영화 속 한석규에게 김윤진이 있다면 나에겐 한은혜가 있다. 그녀는 언제나 내 옆에 앉아 커피에 프림과 설탕 두 스푼을 넣어준다. 가끔 피자와 함께 맥주를 내주기도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나를 껴안으면 질색했다. 그 대상이 부모님이라도 품 안에 갇히게 되면 숨이 막혀 꽥,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의 몸이 내 몸을 스치면 피부 전체에 닭살이 돋는다. 누군가 옆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말을 건네고, 체취를 풍기면 온몸이 쪼그라든다. 그런데 은혜 씨가 안아줄 땐 달랐다. 아무리 세게 끌어안아도 답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술에 취한 듯 기분이 알딸딸해졌다.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늘진 마음에 볕이 들었고, 상큼한 비누 향기를 맡으면 녹슨 뇌수에 윤기가 돌았다.
■ 해설 중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손의 윤리학
윤호준 소설집 『행운반점 12·3』
—김나정(소설가・평론가)
1.
윤호준의 소설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방식으로 세계를 사유한다. 보려면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뒤로 물러나거나 멀리서 봐야 보인다. 그러나 ‘손’은 거리를 지우고 대상과 접촉한다.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체온을 느끼려면 손을 대야만 한다. 손의 서사는 대상과의 거리를 지워버린다. 여느 소설들이 거리를 두고 세상을 관조하고 해설한다면, 윤호준의 소설은 세계와 인간에게 바짝 다가간다. 세상을 만지고 인간의 몸을 느낀다. 환부를 그저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제 손으로 감각한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손들은 아픈 몸을 주무르고 어루만지며, 전복의 껍데기를 쓰다듬고 수타면을 뽑고 김밥을 만다. 손은 노동의 수단이며, 돌보거나 어루만지는 도구가 된다. 윤호준 소설에 도드라진 이러한 손의 감각은 생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담아내는 데 기여한다. 손으로 김밥을 말거나 반죽을 치대는 행위는 정해진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만 완성되는 정직한 노동이다. 여기서 손은 자본주의적 효율성보다는 느리지만 소중한 삶의 가치를 지키는 도구가 된다. 또한 굳은살이 박이고 물집이 잡힌 손은 고단한 삶을 증명하고 기록한다.
이 소설집에 유독 물리치료사가 자주 등장한다. 이 직업은 타인의 몸에 직접 손을 얹는 일을 본질로 삼는다. 거리를 두거나 도구에 의지하지 않은 채, 맨손으로 상대방의 통증 부위를 찾아 누르고 만지며 주물러야 한다. 환자의 반응을 손끝으로 읽고, 강약을 실시간으로 조절하고, 몸과 몸 사이에서만 생성되는 신뢰 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그런데 이 접촉은 소설집 안에서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김밥 잘 마는 방법」에서 마사지 로봇 슈퍼맨이 등장했을 때, 처음에 환자들은 콧방귀를 뀐다. 기계가 사람 손맛만 하겠냐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맨 앞에 환자들이 줄을 늘어선다. 황금손가락 스무 개가 경쾌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무의식적인 신음이 뒤섞이는 물리치료실에서, 이십 년을 온몸으로 노인들의 아픔을 받아낸 김상구의 베드 위엔 아무도 눕지 않는다.
하지만 유능한 기계인 슈퍼맨은 환자와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기능은 우월하지만, 돌봄의 대상인 인간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환자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침묵 속의 통증을 감지하지 못하며, 자신의 손이 만지는 몸의 언어에 응답하지 못한다. 그 한계는 교장선생님의 허벅지를 찢는 사고로 현실화된다. 동의와 신뢰, 살아 있는 반응 읽기가 없는 접촉은 결국 몸을 다치게 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돌봄 노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그것이 왜 기계로 대체될 수 없는지를 말한다. 이는 접촉의 본질이 단지 기능에 있지 않으며, 교감하지 못하는 손은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접촉은 때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제주에 온 사람들」에서 화자의 매형 조태규는 어깨에 손을 얹는 것에서 시작해 허리를 감싸고,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 성추행을 자행한다. 이 접근 경로는 물리치료사가 통증 부위를 찾아가는 동작과 섬뜩할 만큼 유사하다. 점진적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한 단계씩 나아가는 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물리치료는 환자의 동의와 신뢰에서 이루어지고, 성추행은 타인을 기만하며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데서 기인한다. 동의의 유무가 같은 신체 접촉을 치유와 폭력으로 갈라놓는다.
하지만 그 경계는 때론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테니스 잘 치는 방법」의 화자는 환자의 아랫배를 누르는 시술을 정당한 치료라고 믿지만, 환자는 불쾌함을 느끼고 성추행으로 신고한다. 「집게손가락」의 의사 강은 양심적으로 진료하려고 애쓰지만 오해에 직면한다. 치료적 접촉과 침해적 접촉 사이의 경계는 행위자의 의도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권력 관계 안에서, 항상 협상되고 재구성된다. 작가는 이 경계의 불안정성을 직시하면서, 타인의 몸에 닿는 행위가 얼마나 복잡한 윤리적 지형 위에 놓여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집에서 접촉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한쪽 끝에는 신뢰로 쌓인 치유적 접촉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타인을 소유하려는 폭력적 접촉이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선의와 오해와 권력이 뒤엉킨 회색 지대가 있다. 「집게손가락」의 강이 두 마디가 잘려나간 집게손가락을 들여다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장면은 이 회색지대의 불안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타인의 몸에 닿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닿지 않을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이미 상처 입은 손.
윤호준의 소설은 ‘손의 서사’다. 그의 인물들은 손을 통해 세상의 온도를 재고, 손으로 끼니를 마련하며, 손으로 서로의 환부를 어루만진다. 하지만 그 손은 때로 타인의 삶을 휘젓거나 훼손한다. 손은 돌봄과 위로의 경계를 더듬거린다. 이는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그 감각을 어떻게 믿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