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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과 숙면 사이
유영호
시집
국판변형(145*205)/128쪽
2020년 6월 10일
979-11-5860-851-4(03810)
10,000원

□ 시인의 말

 

궁색한 변명

겁 없이 내갈겼던
수많은 단어들이
제멋대로 날뛰다가 지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덕지덕지 먼지를 뒤집어 쓴
글을 보며
더 써야하나 그만둬야 하나
갈등이 깊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래도” 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묵은 세월을 털어냈습니다.

 

2020년 봄
월악산 아래 산촌에서
유영호

 

 

□ 본문 중에서


*다르지만 같은

 

허기진 차가 들어선다
이제 막 여덟시가 지났는데
벌써 빈자리 찾기가 힘들다
몇 번을 들락거려
겨우 차를 대고 나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바짝 올라붙은 뱃가죽
어둠을 밝히는 푸른 안광에
꼭 먹고 말겠다는 결기가 가득하다

승강기를 기다리는데
뱃속은 벌써부터 아우성이다
끼니를 걱정하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와
밥벌이를 위해 세상과 맞서는 사람
무엇이 다른 것일까
닫혔던 승강기문이 열리고
짜장면냄새가 먼저 내린다

한 끼를 위해
어둠을 뒤지는 고양이
밥을 주문한 사람
밥을 배달한 사람.

 


*추락

 

기온이 추락했다
나뭇잎이 추락했다
덩달아 삶도 추락했다

추락하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반등할 기미조차 없는 불경기에
자영업자 소득은 곤두박질치고
판매부진 수주절벽에
직장도 문을 닫아
청춘을 바친 일자리도 추락했다
직업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
혼밥 혼술은 일상이고
결혼율도 출산율도 동반 추락했다

추락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금수강산을 제 멋대로 파헤치며
국민의 세금을 거덜 냈던 사람은
막장까지 떨어졌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국민을 농락하던 두 여인도
교도소에 들어앉았다

이렇게 온 나라가 추락했는데
차기 선거에만 집착하며
지지율 하락을 고심하는 정치는
저 많은 추락들을 어찌 곧추세울까.

 


*나의 생존법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워서 죽겠다던 사람들
이젠, 더워 죽겠다는 말
입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배고파죽고 배불러죽고
아파죽고 웃겨죽고
이래죽고 저래죽다 보면
살아남을 사람은 누구

푹푹 삶아대는 삼복더위에
가로수도 축 늘어졌고
담 밑에 포도나무는
맺혔던 열매조차 떨궈버린다

아스팔트도 맥을 못 추고
물컹거리는 땡볕에
매미도 죽겠다 아우성이지만
난, 살기위해 침묵.

 


*아! 옛날이여

 

가을걷이를 끝낸 박영감
마을사람들과 나들이 간다
의자에 앉자마자 주거니 받거니
그을린 얼굴은 벌겋게 불이 붙고
노랫가락에 취한 버스는
덩달아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몇 순배 돌고 돈 술잔에
방광은 터지기 일보직전
괄약근에 힘을 주며
휴게소 찾아 소리를 지른다
힘겹게 도착한 화장실
급하게 방뇨하다 보니
소변기에 파리 한 마리가 붙어있다
쫓아낼 요랑으로
아랫배에 힘을 줘보지만
배수구근처만 오르락내리락
파리근처는 어림도 없다
까치발을 들고
다시 한 번 용을 써보지만
애먼 방귀만 바짓가랑이로 새나간다.

시인의 말 _ 궁색한 변명

 

 

1부 추락


다르지만 같은
추락
2020년 대한민국
멸치 살이
창문 하나 바꿔서
라면을 끓이며
메밀국수의 바램
이런 제기랄
박 씨의 꿈
놀이터가 심심하다
흘러야 한다
중년남자·2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태풍에게
창백한 세상
날씨들의 지방자치
담배가 땡기는 날
인력시장·4
난 무슨 파?
神을 질책한다
초승달
찬밥
노숙자의 하루
불통보다 소통
절름거리는 오후
라면을 먹다가
속물들의 신년회
타협

 

 

2부 숙제


나의 생존법
아! 옛날이여
불면과 숙면 사이
내가 길
대단한 고민들
숙제
두통 찾기
어느 부부
가는 길
마지막도 내 탓
가을 골목에서
여전히 나무
삶을 조율하다
게으름 즐기기
부도난 약속들
남자도 울고 싶다
낮선 밤에 흔들리며
오후, 출렁거리다
다시 시작
그 남자의 고향
조약돌이어서 행복해
애먼 밤
늙은 해녀의 바다
빈 기다림
세상은 멀미 중
갯바위
비에 떠밀리던 날

 

 

3부 기억


마지막 용돈
풀에서 흙에서
새댁
돼지꿈 꾼 날
새벽에 만난 아버지
고주박이 아내
영등포역 골목의 추억·2
쑥국을 먹으며
조기의 꿈
아내들은 모른다
끝나지 않는 전쟁
만만한 음식
아버지, 은행나무를 닮다
기억을 만나다
또 그때
국물 한 숟가락이 세상을 녹인다
기억·3
어떤 휴일
놀이터의 기억
박하사탕
만어사의 가을
중년
가을에서 겨울을 보다
밤은 길을 잃고
하와이안 썬셋
허기를 기억한다
마주치는 것들
빈 기다림

 

해설
절벽 위의 풍경, 미味-美감의 필법 ― 김순아(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유영호(劉榮浩)


시인, 수필가, 사진작가

2008년 만다라문학상 수상
2010년 가오(佳梧)문학상 수상

시집
『혼자 밥상을 받는 것은 슬픈 일』
『바람의 푸념』
『불면과 숙면 사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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