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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로 간 가야왕국 4
신규성
장편소설
신국판/124쪽
2021년 6월 10일
979-11-5860-955-9
10,000원

■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

필자는 청년시절 인도에서 3년을, 중국에서 6년을 산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그저 팔자거니 했으나, 이글을 쓰면서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한 사람임에도 운명의 신이 내게 부여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이라더니.

연이나, 이 소설은 대하소설급 장편소설임에도 따로 제4부만 먼저 출판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라면서 착잡한 마음으로 이 책을 낸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암 투병 중이신 어머니가 일 년만 더 사셨으면 여한이 없겠다.



■ 시놉시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미완의 왕국 금관가야이다. 가야를 건국한 세력이 김해 김씨이니, 김해 김씨는 제2의 주인공인 셈이다. 금관가야를 재조명하고, 두 주인공인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발자취를 찾다 보니 이상한 점이 나타났다. 특히 허황옥이었다. 허황옥은 스스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 했는데, 신부의 혼수품은 죄다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그 어느 누구도 이점을 속 시원히 밝힌 이가 없는데, 다행이 김병모 교수께서 밝혀내었다. 이로써 인도신부의 혼수품이 중국제인 이유가 밝혀졌다.

<제1부> 아소카 왕이 통치하던 마우리아왕조는 대왕이 붕어하자 부하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만다. 뒤이어 들어선 슝가왕조는 힌두교를 육성하고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아요디아의 영주 아미타 싱은 일족을 이끌고 남인도의 쿠빰으로 이주한다. 백 년 후 싱의 후손들은 숙명통에 의해 다시 한나라의 험지인 사천으로 이주한다. 이들은 한나라에 벼농사를 보급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제2부> 전한 말기, 나라는 기울고 있었다.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사회질서는 붕괴되었다. 이 어지러운 시기에 흉노의 피가 석인 대유(大儒) 왕망과 역시 귀화한 흉노족의 후손인 당대 최고의 무장 김후락 그리고 인도인 찬드라 싱(허다산)은 운명적으로 만난다. 동갑내기인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서로를 돕기로 작정한다. 김후락과 허다산은 왕망이 왕위에 오르도록 막후에서 힘을 보탠다.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신나라는 급진개혁을 시도하다 15년 만에 무너지고 만다.

<제3부> 신나라는 무너졌지만,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나라를 세웠던 장안 김씨세력은 한반도의 변한으로 들어온다. 일찍이 아사달에서 갈라져 나온 단군조선의 후예인 흉노족 장안 김씨는 토착세력을 누르고 열다섯 살의 소년 김수로를 왕위에 앉히고 새로운 왕조를 건립한다. 몇 년 후 한나라에서 허다산의 손녀 허황옥이 배를 타고 건너와 김수로와 혼인을 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불교는 이때 한반도에 들어왔다.

<제4부> 한일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히미코(비미호卑彌乎, 나중에 신공왕후로 불림)라 불리던 수수께끼의 인물인데, 히미코의 정체만 밝히면 모든 조작이 백일하에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것을 추적했다. 필자는 히미코를 수로왕의 외손녀로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인 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1996)이 결정적 정보를 주었다.
가야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부터 왜 열도로 건너가 임나가야를 열었다. 수로왕의 딸 선묘공주는 규슈로 건너가 야마타이국을 세우고, 선묘공주의 딸 김미희(히미코)는 나중에 근기지방으로 세력범위를 넓혀 야마토(大和)왕조를 연다. 이들은 우두머리를 오키미(大王)이라 불렀다. 일본천황가의 시조이다.
한편 제40대 천무천황 때에 이르러 가야와 백제가 무너진 마당에 한반도와 인연을 끊는다. 왜(倭)라는 국호를 버리고, 일본(日本)이라는 새 국호를 만들고, 역사를 조작한다. 지배받은 것을 지배한 것으로 조작한다. 그 주모자가 백제계 망명인 안만려이다.
신화를 조작하고, 임나일본부를 조작하고, 관산성전투에서 죽은 성왕을 살려 판타지소설(일본서기)을 썼다. 백제는 문화선진국이었으나, 대대로 백제의 왕자는 야마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하면 백제로 돌아가 왕이 되었다. 반면 야마토는 단 한 번도 백제에 왕자를 인질로 보낸 적이 없다.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백제의 제후국이라고 알고 있는 야마토가 왜 칠지도를 녹여 없애지 않고 갖고 있을까. 누가 볼까 없앴어야 자연스럽지 않나. 전 세계 사학자들이 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 상고사는 우리민족의 개척사임은 분명하다. 고대 왜 열도엔 백여 개의 나라가 있었다. 그중 구 할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선조들이 세운 나라이다. 일본 천황가는 부계는 신라·가야에 뿌리를 두고 있고, 모계는 백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일본 황실에서 매년 십일월 일본판 추수감사절인 니이나메사이(신상제神嘗祭)를 지낼 때 왜 백제어가 아닌 가야어(신라어)로 읽어야만 해석이 되는 희한한 초혼가가 등장할까. ‘아지매, 오 오 오 오, 오게(阿知女 於於於於 於介)!’ 천황은 가야(신라)핏줄이기 때문이다. 신상제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 본문 중에서


*제4부. 가야 열도로 가다


신공황후는 수로왕의 외손녀

허 왕후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수로왕은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부부금슬이 유별났던 터라,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따로 없었다. 삼년상을 치렀건만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하긴, 춘추 여든다섯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한때 사자라 불린 불세출의 영웅 김수로도 세월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 듯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갔다. 기력도 옛날 같지 않았고, 정신도 맑았다 흐리기를 반복했다. ‘왕이 치매에 걸렸다!’는 소문은 연기처럼 궁궐을 빠져나갔다. 노쇠한 왕은 국사는 멀리하고 창가에 멍하니 앉아 왕후가 묻힌 무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임금이 맥이 빠지니 융성하던 가야도 나날이 쇠잔해져가는 듯했다.
이 시점 가장 안타깝게 수로왕을 바라보는 사람은 왕세자 다르한 아바르카 거등(居登)이었다. 말이 왕세자지 나이 육십 대 중반이었다. 나오느니 한숨이요, 쌓이느니 시름뿐이었다. 이제 그만하면 왕위를 물려주고 뒷방에 앉아 쉴 법도 하건만, 수로왕은 옥새를 틀어쥐고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등왕의 등극을 기다리는 측근들 또한 애타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야 건국 칠십사 년째인 백십육 년 시월 김수로왕은 세수 팔십팔 세에 노환으로 붕어하였다. 삼한의 밤하늘을 밝히던 붉은 별이 사라졌다! 온 세상에 단풍이 붉게 물든 늦가을이었다. 허 왕후를 보내고 십여 년을 혼자서 쓸쓸히 궁궐을 지키던 수로왕은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갔다. 온 가야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백성들은 머리를 풀고 통곡했고, 삼라만상이 슬픔에 잠겼다.
그동안 임나(任那: 日本)에서 속세의 왕이자 영혼의 스승으로 불교포교에 여념 없던 일곱 왕자도 때맞춰 돌아와 임종을 지키고 이승과 저승 간을 맴돌고 있는 수로왕의 영혼을 인도했다. 각 사원에서는 수로왕의 넋을 기리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도 한동안 애도기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애도의 장막 뒤에는 숨 막히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즉위식을 앞둔 왕세자가 엄연히 살아있었지만, 권력을 향한 암투는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투후 김일제계와 수로왕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김일제는 흉노왕 이치사선우의 번왕(藩王)인 엥르태왕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인 반면, 김후락의 조상은 이치사선우의 상장군이었던 쿠렐바트 김일규의 후손이었다. 그때 포로로 왔던 이들은 한 무제로부터 다 함께 장안 김씨를 물려받았으나, 고국에서는 엄연히 상하관계였다. 그런데 어쩌다 상하가 뒤바뀌어버렸다.

작가의 말 / 5


시놉시스 / 6

제4부. 가야 열도로 가다

신공황후는 수로왕의 외손녀   / 11
신이 된 연오랑과 세오녀    / 22
열도에 환생한 김수로(니니기노 미코토)   / 33
진시황 능을 베껴라!   / 44
기마민족의 출현   / 55
금관가야 종말을 고하다    / 67
을사의 변(乙巳の変)   / 78
백제멸망과 부흥운동   / 90
견신라사(遣新羅使)   / 101
일본의 탄생과 역사조작   / 113

신규성


저자 소개의 프로필을 적으려니 적을 게 없다. 만약 학력을 밝히지 않는 것이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라면 달게 감수하겠다.
떠돌았다. 오래도록. 이천 년도에 국내에 돌아와 학 원가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밥벌이랍시고 했다. 구차 한 삶이었다.
우연찮게 지방지(제주신문, 경남매일, 경북일보)에 칼럼을 쓰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불혹의 나 이에 문단에 등단했다. 불교문학 계간지 <실상문학> 에 「호접지련(胡蝶之戀)」으로 등단했다.
장편을 선호하다보니 문협에 회비만 내고 글 한번 올 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궁리 끝에 내용을 나누어 출판하기로 했다. 이 묘수를 찾는데 십 년이 더 걸렸다. 아둔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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