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디딘 현실은 늘상 황야였다. 왜 시냐고 묻는다. 그 감각이 걸어온 길을 그나마 대답을 하여 주기 때문이라 답한다. 삶이고 죽음이고 저항하는 것에서 결국 시라는 것에 기대고 싶다.
글을 쓴다는 것은 늘 위험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그것은 글을 이제 쓰기 시작 한 사람이나, 몇 권의 책을 펴낸 작가든 마찬가지다. 시를 쓰는 것은 영감이라고 한다. 영감이 오는 것으로 생각도 한다.
멋진 글의 영감이 온다는 생각은 집어치워라. 찾아 나서는 험난의 길이다.
송재구 회장의 말을 빌리면 “사람을 키워주는 건 나를 더 나은 곳으로 안내하는 실패뿐이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인생이란 초고도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말한다.
고민과 고독, 실패 속에는 영감이 들어있었고 인생을 어떻게 나누고 만들 건지, 들어있었다.
노트북에서 갑갑해, 하는 시詩들을 터무니없는 서사敍事의 세상 속으로 3년 만에 내, 보내기로 했다.
창작 활동과 격론激論하고 자라도록, 현명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방식 명장, 송재구 회장, 양애경 교수, 최희양 작가님께 맨 먼저 시집을 올린다.
2023년 봄 성북동 성곽길에서 최창일
■ 본문 중에서
*설원역雪原驛 0시발
생각도 소복소복 쌓이는 것을 알았다 육각형 편지지 속에는 불 밝힌 신방의 추억이 흩날리고
산다는 것은 소리 없이 눈 덮인 겨울밤의 0시발始發 이야기
눈 내리는 언덕 돌아볼 때마다 곁을 떠났던 시의 관능과 실존의 관능 사이가 홀연히 뛰어 내려온다
진한 커피 향이 잔을 움켜쥐고 시린 창가에 내려앉는다
어젯밤 달빛이 그리 밝더니 함박눈 닮은 스토크Stock 내리고 산새는 밤 지새고 겨울나무들은 어둠 속에 빛을 얻는다
불 꺼진 방에 불 켜는 것도 손길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0시발에 내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송이, 존재의 벽을 무너뜨린다 그 고독과 그리움은 이상하게도 가슴에 불을 붙인다
자정이 넘어가는데 막차를 기다리는 설원역 맞이방 난로에는 삶에 대한, 감정과 기억 속의 사랑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시원의 입술
시의 둘레길은 푸른 별이 뜨는 정원
시의 꽃을 무한대로 ‘시화무’*가 피워내고 해와 달이 먼 강물에 발을 적시는 시간이면 풀이 꺾이는 바람에도 생을 끌어안고 <시원의 입술>은 이렇게 살아 노래 부른다
안개 끼고 앞산이 보이지 않아도 시원의 빛은 산빛 맑게 단장하듯 정결한 입술로 다가선다 배꽃의 입술은 희디흰 순결의 말씀 되어 우주의 노래 부르고 물방울 속에 시간의 무늬를 그린다
저 들판의 강물은 하얀 시가 되어 굽이굽이 흐르고 또 다른 말씀은 구름 사이 감돌며 가난한 자에 다가온다 가까이 멀리, 낮은 자에 들려주는 입술의 경건이여 시대의 중심에 서서 우리를 다독이는 문장들이 시원에 내린다
*시원詩苑의 입술: 시의 정원은 시가 되어 시를 말한다. *시화무: 시의 꽃을 무한대로 피워낸다는 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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