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소설을 쓰기 전 가슴속에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응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소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서투른 글로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고 나니 한편으론 시원했고, 한편으론 부끄러웠습니다. 이 소설은 직업인으로서 가지는 자리의 책임감과 무게에 대해 고심한 저의 작은 흔적입니다. 오늘도 삶이라는 정글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돌아와 조건 없이 쉴 수 있는 보금자리, 바로 현대인들의 80%가 거주하는 아파트가 아닐까요? 누구에게는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고, 누구에게는 밥 줄이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는 삶을 정리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제 글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그래도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고, 아파해주고, 어깨동무해 줄 수 있는 작은 휴식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아파트의 안녕을 위해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신 관계자분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
■ 본문 중에서 성연이 보기에 갑과 을의 세계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늘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갑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늘 을이다. 제아무리 갑인 사람도 세상 모든 곳에 갑이 될 수는 없다. 누구나 갑이 되고 을이 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 「너의 자리」 중에서
한참을 대답하다 보니, 내가 마치 낚싯바늘에 꿰어 있었던 미끼를 먹으려다 미늘에 아가리가 걸린 물고기 같았다. 그래서 버둥거려 보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물고기 신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나는 어쩌면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가 입에 문 미끼일지도 몰랐다. 물고기가 물고 삼키면 사라지고 마는 그런 미끼. - 「고래가 삼킨 물고기」 중에서
한 번도 간절하게 무엇을 원하지 않았고, 얻으려고 발버둥을 친 적이 없었다. 누구와도 부딪힌 적 없었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웃거나 피하기만 했던 나였다. 나의 아군만큼 적이 생긴다고 했던가? 내게는 아군도 없었고, 적군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나의 사람이 아니었다. - 「섬 안의 섬」 중에서
성실은 일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반가웠지만, 우리 팀이라는 미화 반장의 그 말이 더 고마웠다. 한 번도 그녀에게 소속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나라’라는 단어가 그녀에게는 늘 멀게만 느껴졌었다. - 「성실과 클라리사 벨른」 중에서
통로에 붙은 거울 속에서 경비 모자 밑으로 쑥 삐져나온 흰머리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그리고 놈에게 걷어차인 얼굴 한쪽이 벌겋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제 나도 더 늙어 버려질 고철이 되기 전에 내 자리를 찾아야지. 싶었다. - 「엘리베이터」 중에서 상대는 두 사람, 상운은 혼자였다. 위탁회사에서도 모른척했다. 상운이 근무하는 동안 그런 일은 두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허탈했다. 결국, 상운이 아파트를 떠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보면 상운은 나그네였으니까. - 「가지 끝에 머문 햇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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