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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
이영산
장편소설
신국판
2024년 3월 7일
979-11-6855-229-6
17,000원

■ 작가의 말


한 세기 전(1917), 독일의 한 종교학자는 당시 서양의 신(神) 인식, 오랜 시간 속에서 합리적 철학 위에 구축된 ‘신성(神聖)’에 이른바 ‘비이성적인 신’, 독창적인 저술로 관심을 모은다. 특히 세계 종교계에 불러일으킨 비상한 관심은, 전적으로 그의 새롭고 독자적인 관점 때문이었다.
그는 책에서 신이나 종교라는 관념 대신 종교적 경험의 여러 형태를 분석한다. 그는 종교에서 합리적, 사변적 요소를 배척하고 무엇보다 종교의 비이성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에게 ‘살아있는 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의 신도 아니요, 관념이나 추상 개념도 아니고, 단순한 도덕의 상징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성스런 분노 가운데 나타나는 두려운 힘, 그는 경외와 비합리적인 경험의 특징을 발견해 내려 한다. 그는 성스러운 것 앞에서의 두려운 감정,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 압도적인 힘의 위력을 분출하는 장엄함을 발견한다. 즉 그는 존재의 완전한 충만성이 꽃 피어나는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앞에서의 경건한 두려움을 발견한다(M.엘리아데).
그는 신성—성스러움이란 말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본질을 나타낼 수 없다고 하여, 라틴어 누멘(numen: 아직 명확한 표상을 갖추지 않은 초자연적 존재)에서 이 말을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한 세기 전이면, 철학자 니체가 활약했던 시기가 그 직전이었다. 어쩌면 루돌프 오토는 시대적으로, 종교학자로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학문을 한 셈이었다. ‘신은 죽었다’, 신을 상실해 가는 시대에 그는, 어떤 종교의 본질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어느덧 나이 육십을 훌쩍 넘긴 나 같은 한국인은, 오히려 오토의 관점에 무척 친숙하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자란 내 어릴 적의 주변 환경은, 거의 무속적(巫俗的)인 원초적 종교성 속에 있었던 걸 기억한다. 거기엔 철학이나 이성, 종교의 관념이 아닌 ‘실재의 신’, 분노하는 신비한 신이 있었다.
오늘의 ‘무신성(無神性)’은, 새로운 시대, 어쩌면 인류에게도 무척 새로운 시대인 것이다. 마치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이 옅어지는 걸 넘어, 이젠 그 무신성이 당연한 시대, 새로운 인류,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라 할 만했다.
이 거리며 환경은, 그런 무신성의 거의 완벽한 구현인 셈이었다. 종교성과 결별한 인류의 미래를 점치는 건, 내겐 그다지 흥미를 끄는 주제는 못 된다. 오늘의 종교들이 포교하는 것만큼이나 유치한 것이 될 터이니.

이 소설은, 지극히 사적인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이다. 오토처럼 종교의 어떤 본질을 다루지도 않았다. 기독교라는 종교, 또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 이야기’라고나 할까. 어쨌든 난, 한 시기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나는 이 작품을 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그만큼 내겐 힘든 시간이었고, 진퇴양난을 거듭했다. 하지만 나는 써야만 했고, 이런 소설을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이랄까, 마치 사회에 빚을 진 자마냥, 처음에 임했던 기억이 새로운 것이다.
헌데 오늘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내가 생산한 이 소설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과연 나를 사로잡아 이끌었던, 그 지난날의 낙담하고 분노했던, 신앙이라 느꼈던 ‘의로운 감정’은 여전히 유효한가. 솔직히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소설을 마침으로써 기나긴 고투(苦鬪)며, 한편으론 내 안의 상실감은 그 해방감과 함께 운명적이었다.
배교자—주인공은, 오늘도 밤의 여행자를 자처하며, 대리기사로 근근이 살아간다. 오랜 광야(廣野) 생활, 그의 오늘의 모습은, 그 힘든 노동이나 삶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심판’으로 보일 터였다. 한때 그는 서울 강남의 대교회 담임목사 사위이자 부목사였으니, 그런 참담한 전락(轉落)은 신앙 좋은 어떤 이에겐 입가에 고소가 번질 얘깃거리였다.
헌데 그는, 이젠 고난의 여정이 베푸는, 그만의 눈으로 저 휘황한 신도시의 광장 안, 매일 밤 벌어지는 풍요의 축제, 간섭할 신도 없는 인간들만의 낙원(樂園)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지난날을 꿈결처럼 회상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닌 많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 매년 절에 나가 등(燈)을 달았고, 불교도보다는, 무당도 수시로 집에 들였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식들이 목회자가 됐을 때,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변신했다. 오직 관심사는, 자식들의 무병(無病) 건강과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로 이 작품을 써야 했다. 이 소설은, 그런 내 어머니에게 바쳐져야 하는 건 마땅하고도 당연한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사랑’에 국경과 장벽이 없듯, 저 열렬한 항변엔 깊은 뜻이 있다. 외도는 차가워진 심장을 뛰게 하고, 책임감, 성실성은 더 공고해지고, 모두에게 이로움으로 승화시켜 준다나.

그러고 보면, 저 부족할 것 없는 남자에게, 신은 그저 그 어렴풋한 ‘환상곡(幻想曲)’일 따름이었다. 그 환상곡이란 게 본질적으로 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지극히 편리한 환상의 일종이란 점에서, 그리고 오늘을 사는 누구도 그 환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부조리극의 연출자로서 인간은, 늘 욕망의 존재로서 충실했다. 그 투명한 불빛은 어둠을 밝힌다기보단 오히려 한층 더 환상적인 부조리극을 연출하는 거였고, 여흥(餘興)과 환상 속, 빛의 자녀들로서 무척 어울리는 낙원이었다.

“목사님, 저 같은 평신도도, 어릴 적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질서를 알았어요. 아버지를 증오했던 이유예요. 돈 잘 버는 회사 사장이니까, 간통하고, 폭력, 복종, 평화로운 집안을 원했으니까요. 어린 제 눈에도, 그런 이율배반이 없었어요. 난 죽음으로 맞서려 했어요. 내가 맞설 무기가 그것밖에 없더라구요. 그런 나를 신앙의 길로 인도해 준 분이, 두 주인을 섬기더군요. 왜, 왜 목회를 하죠? 뭐, 저도 이젠 알 만큼 알았습니다만!”

의로움, 의로움으로 충만했고, 투쟁했던 신학이 퇴색한 것이었다. 급격한 시대의 변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들이 열망한 사상(신)의 퇴색이었다.
민중의 예수, 그 해방자요, 부활한 민중, 그는, 어떤 화려한 신학과 갈릴리의 인간 예수, 그가 전한 복음, 그 가난한 영혼들을 동시에 떠올리곤 했다. 그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현대신학들도 그런 신학들이었음을 훗날 고백하기에 이르지만.

작품 소개  4


작가의 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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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이영산


1960년 전남 진도 출생.
젊은 시절 잡지 기자, 편집장을 지냄.
형과 남동생이 신학대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고,
두 누님과 여동생도 전도사, 목사 부인이 되었다.
삼십 대에 뒤늦게 신학을 했지만,
목회자의 길을 포기함.
한때 서울 강남의 이름난 교회에 다녔으며,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왔고,
이 소설엔 그런 작가의 영혼이 오롯이 투영됐다.
동양문학 신인상. 장편소설 『배반의 땅』(3권),
장편소설 『날자, 알바트로스여』,
단편소설 「망각의 늪」, 「귀향」, 「괴물」 등을 씀.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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