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소금이 오는 소리는 우주가 열리는 소리이자 생명의 소리야” 우리네 일상을 수놓는 다채로운 감각과 감정 그 기원에 얽힌 소금처럼 반짝이는 서사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라는 두 가지 시간 개념이 있었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각자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창조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시간을 크로노스로 받아들이면 시간의 노예로 수동적인 삶을, 카이로스로 인식하면 시간의 주인으로서 능동적인 삶을 펼쳐나갈 수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말처럼 의미 있는 삶이란 크로노스 시간에서 카이로스 시간으로 전환해 가는 것이다.
낱말은 상호 유기체적인 것이어서 어떤 낱말이 결합하느냐에 따라 문장이 생동하기도 하고 힘을 잃기도 한다. 문장들을 낱낱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가시 돋친 낱말을 핀셋으로 뽑아내며 정교하게 조율하다가 새벽을 맞이한 날도 있었다. 쓰러진 귀룽나무가 떡갈나무에 기대어 꽃을 피우듯 낱말도 서로 상생한다. 화룡점정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행을 자초하며 퇴고를 거듭하는 일이 작가의 숙명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수년 동안 낱말과 밀당하면서 카이로스 시간을 보낸 산물이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등을 도닥여 준 최초의 독자인 아내에게 이 책을 바친다.
■ 본문 중에서 엄마꽃 “누가 박재선이를 나오라고 해.” 엄마가 창밖을 내다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창문 밖에는 목련이 새벽빛에 어렴풋이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엄마는 밖에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당신 이름을 부른다며 창문을 응시했다. 나는 얼른 구급상자에서 청심환을 꺼내드리고 밖에 아무도 없다며 엄마를 안심시켰다. 엄마는 자리에 눕고도 환청이 들리는지 불편한 몸을 자꾸 일으키려고 했다. 스치기만 해도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핏기 없는 얼굴, 쑥대머리처럼 헝클어진 백발, 초점을 잃고 흔들거리는 눈동자…. 형광등 불빛에 민낯으로 드러난 엄마의 모습은 혼백이 나가버린 반송장이었다. 나는 엄마와의 약속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스텐 양푼에다 밀가루를 붓고 물을 섞어가며 반죽을 시작했다. 되게 반죽을 개면 밀가루 덩이가 그대로 씹히는 맛이 나고, 반죽이 질면 풀을 쑨 것처럼 밋밋하다. 쫀득쫀득하게 밀가루 반죽을 빚어내야 수제비가 감칠맛이 난다. 수제비는 손맛이다. 그리고 손맛은 반죽에서 나온다. 자장면이 면발에 따라 맛이 다르듯 수제비 또한 반죽에 따라 식감이 다르다. 반죽 한가운데다 구멍을 내고 물을 조금 더 부었다. 겉에다 물을 부으면 반죽이 질척거려 작업하기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수분이 골고루 스며들지 않아 좋은 반죽이 나오지 않는다. 수제비를 빚다 보면 옹이처럼 반죽 속에 밀가루 덩이가 박혀있는데 그건 실패작이다. 반죽할 때 찬물보다는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면 흡수가 잘되어 옹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수온 13~15도의 물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이 상태에서 인체에 수분 흡수가 가장 빠르며 이보다 물이 너무 차갑거나 뜨거우면 수분이 세포로 스며드는 속도가 더뎌지고 몸에도 좋지 않다. 온도에 따라 물의 입자가 달라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 양쪽 무릎을 꿇고 밀가루 덩어리를 뒤집으며 안간힘을 다해 반죽을 빚었다. 무릎이 시큰거리며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문득 중학교 1학년 때 은사인 김미나 선생님이 떠올랐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 담임인 김미나 선생님은 가정방문할 마을을 칠판에다 적으며, 해당 지역에 사는 학생들은 해찰 부리지 말고 곧장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가정방문이 있는 날은 오후 수업이 없어 기분이 들떴다. 나는 앞마당까지 길게 내려온 산 그림자를 시계 삼아 들에 나간 엄마를 대신해 수제비를 만들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내 사랑하는~.”
음악 시간에 김미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매기의 추억’을 흥얼거리며 한창 수제비 반죽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나를 불렀다. 문을 여니 하얀 원피스 차림의 김미나 선생님이 툇마루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밀가루가 묻은 손을 얼른 뒤로 감추고 멋쩍게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후끈거리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우리 마을은 오늘 가정방문 일정표에 빠져있었다. 선생님은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뽀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치켜올리며, 옆 마을에 왔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들렀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 무슨 요리 하고 있니?” 한참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수제비 만들려고 밀가루 반죽하고 있어요.” 나는 부끄러워 이마에서 땀이 났다.
서울 토박이인 선생님은 신기했던지 부엌에서 손을 씻고 와서는 반죽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선생님이 야무지게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반죽을 주물러대자 긴 머릿결이 허리 위에서 미끄럼질쳤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제풀에 꺾인 선생님은 반죽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며 숨을 할딱거렸다. 나는 선생님과 나란히 아궁이 옆에 앉아 물이 끓어오르는 솥단지 속으로 수제비를 떨어뜨렸다. 선생님이 빚은 수제비는 선생님의 반반한 얼굴과는 달리 모양이 뭉툭했다. 적당한 크기로 반죽 덩어리를 떼어내 손가락 끝으로 수제비를 빚어내야 하는데 선생님이 만든 수제비는 모양이 들쭉날쭉했다. 나는 수제비 빚는 방법에 대해 시범을 보였다. 손끝에서 순식간에 목련 꽃잎처럼 예쁘게 빚어지는 수제비 솜씨에 선생님은 눈길을 빼앗겼다. 선생님은 긴 손가락 끝으로 반죽을 조심스럽게 매만져 가며 어쩌다 수제비 모양이 잘 나오기라도 하면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어느새 선생님의 분홍색 손톱은 하얀색으로 변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