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의 가면 뒤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배우들 온기와 냉기가 공존하는 강송화 단편소설집
빨간 연극
강송화 작가의 작품들은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일단 책장을 넘기면 단숨에 읽지 않고는 못견디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연민이 가슴 속 깊은 심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슴이 따뜻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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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창작집 『구스타브 쿠르베의 잠』을 출간한 지 9년 만이다. 그동안 문예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추려보았지만, 아직도 미완의 첩첩산중에 갇혀 있다. 한여름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했다. 신경은 예민해졌고, 몇 번을 포기할까 망설였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을 고통스럽게 버티고 있던 차, 강화에 사는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무작정 가방을 챙겨 강화도로 향했다. 고택 마당은 온통 잡초투성이였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풀을 뽑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달려온 선배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풀도 소중한 생명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아무 생각 없이, 쓸모없다고 뽑아버린 잡초도 소중한 생명이었구나. 누가 인정하든 말든 최선을 다해 제 몫을 하는 생명! 우악스러운 내 손길에 뽑혀나간 잡초들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순간, 아무런 저항 없이 널브러져 있는 저 잡초들처럼 한순간에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도 있는 내 작품들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무릇 어떤 생명도 반드시 그 존재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어,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책무를 다하는 것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생명들을 다시 애잔하고 소중하게 들여다보았다. 활자 하나하나가 까만 눈동자를 하고 깜빡거렸다. 남들이 예쁘다 하건 밉다 하건 그것들은 소중한 나의 자식들이었다. 어쩌면 못난 자식이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른다. 잡초 같아도 싱싱한 생명력을 발휘하려고 눈을 부릅뜬 내 작품 속 활자들을 홀대하지 않기로 했다. 소중하게 다독이며 가다듬자, 어두운 그림자에 갇혀 있던 각각의 인물들이 환하게 걸어 나왔다. 드러내지 못한 상처 받은 여성들의 아픔이 뜨겁게 활보했다.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그 생명의 실체들이 하나씩 하나씩 정리가 되어갔다. 그들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보낸다.
봄에 시작했는데, 어느덧 낟알을 거두는 가을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내 소설의 열매에 과연 제대로 맛이 들었을까? 결실의 계절은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렵다.
2019년 가을 강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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