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그리스 여행 중 코린토스(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고대의 영광은 사라지고 돌무더기만 남은 적막한 도시에 홀로 우뚝 솟은 해발 575m의 아크로코린토스 산을 만났습니다. 두터운 성채로 둘러싸인 산 정상에는 코린토스의 수호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 터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교역과 상업의 발달로 환락의 꽃이 된 도시 속, 높은 신전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던 천여 명의 여 사제들은 겐그레아 항구와 레카이온 항구를 통해 외국선박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산에서 내려와 남자들에게 몸을 팔고, 대가로 받은 돈을 다시 자신의 여신에게 헌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미의 총화인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무한한 동경의 눈길을 보내며 날마다 온 마음으로 제사했을 고대 여 사제들이 시현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녀들에게 아프로디테 여신이란 완벽한 외적 아름다움과 여성적 매력, 부산물인 풍요로움까지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간절히 닿고 싶으나 결국 닿을 수 없는 열망의 별이었을 테지요. 어쩌면 열망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랜 시간을 따라 마모되고 풍화돼버린 여신의 신전 터를 응시하는데 그 순간 마음에 차오른 감정은 뜻밖에도 슬픔과 연민이었습니다. 아름다움과 성(性), 그리고 풍요를 숭배하는 세계란 어쩐지 한 몸에 세 개의 상체가 붙어있는 샴쌍둥이처럼 버거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여신의 환상을 떠나 자유로워지기란 무척 어려워 보였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숭배 받고 있는 아프로디테의 화려한 옷자락을 느꼈다면 여행자의 과람한 상상이었을까요.
신화와 과학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우리 시대 문화의 집약체인 성형수술을 통해 아프로디테 여신이 진화해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거슬러 오르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인간이 그토록 닿기 원하는 열망의 비밀에 대해 조금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글 쓰는 내내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흘깃 엿본 열망의 입자들이 너무도 비루하고 초라해 물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의 원형인가 싶었습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그 열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우리 시대 자화상을 보듯 부끄러웠습니다. 열망은 시간을 따라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난제라는 걸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닮은 가엾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가진 그대로의 부끄러운 열망을 표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열망의 초라한 자화상에도 불구하고…… 열망보다 더 아름다운 소망이 우리 곁에 있어서 다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건 여전히 큰 힘이 됩니다. 주후 50년 경,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스로 옮겨와서 열망보다 더 아름다운 참 소망을 외로이 설파했던 한 남자를 기억합니다. 그 아름다운 소망 때문에 부족한 필력의 걸음을 앞으로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이 출간되기까지 도와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열망이 아닌 타인의 소망을 위해 살아가는 분들이 옆에 계셔서 행복합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2019년 가을에, 심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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