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오래전부터 평소 생각이 떠오를 적마다 적어 놓은 글과 여러 문학지에 발표했던 글을 퇴고하면서 몇 번의 계절을 그냥 보내고 말았다. 정리를 시작하던 중 시조시인 사봉 장순하 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선생께서는 「경시조 산책」이라는 글에서 ‘시인이 시를 짓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상념을 캐내어 그것을 구슬처럼 갈아내는 보석 장인의 공정과도 같다. (중략) 그것은 경건하고 진지하기가 숭고한 종교의식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시인의 자세에 대한 너무나 엄중한 경고의 메시 지를 남겼다. 이후 고심의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다. 사실 장인의 경지에 범접할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수차의 퇴고 작업으로 다듬어 보면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했으나 아직도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더구나 생활 주변에 산과 하천 등 아름다운 영감의 소재가 많았는데도 담아내지 못해 더욱더 아쉽다.
소싯적엔 자연의 본성을 통해 인간적 염원과 가치를 찾는 청록파 시류를 동경하여 왔으나 최근 많은 시를 접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시의 본류는 서정성이라는 관념에 충실히 하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눈에 밟히는 문제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 가장자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역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색과 명상의 시간 할애가 많아야 함에도 일상에 묻혀 생활하다 보니 표현의 순수성을 모색하 는데 어려움으로 다가옴을 절감하기도 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된 가장 큰 의미는 조그마한 삶의 궤적이라도 남기고자 함에 있다. 그리고 페이지 여백마다 좋은 그림 으로 자연의 향기를 불어 넣어준 친구 우취(又翠) 장건이 화백에게 감사를 표한다.
庚子年 二月 龍仁 大地山 아래에서 임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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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짧은 인연
흩어지는 시간의 잔해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가뭇없는 인연의 아쉬움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들녘
맑은 바람 속에 설레임으로 머물다 아련함만 남겼을 뿐인데
잊혀진 만큼 지워진 세월의 숨결이 햇살 가득한 푸른 산자락에 아직도 낯익은 그리움으로 남아
미처 끝내지 못한 말들의 여백을 홀로 메꾸고 있다. |